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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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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


감정을 일체 배제한 어둡고 탐욕적인 사회를 냉철하게 그려낸 소설이라면서요, 그럼 이 소설을 읽고 저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가요, 선생님······. 빠른 전개 자극적인 스토리라인 쉬운 문장. 현대인이 아주 좋아할 만한 소설이다. 나도 현대인이므로 이 소설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단순히 자극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어떤 죄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도 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에서는 카뮈가 왜 이 소설을 읽고 “이방인”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는지를 명확히 느낄 수 있으므로 실존주의나 카뮈에 관심 있는 사람들, 파멸적이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나 추리 소설(의외로 추리소설적 요소가 많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중간에 매춘부 언급이 한 번 나오는데 옛날 책이니까 우리 한 번은 흐린 눈으로 넘어가 줍시다.


1.

누아르, 하드보일드 소설의 창시격이 된 소설이라기에 형사물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파멸적인 사랑 이야기에 더 가까운 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방랑자의 삶을 살던 ‘패트릭’은 우연히 도달하게 된 어느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어 일하게 된다. 식당은 남편인 ‘닉’과 아내인 ‘코라’ 둘이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패트릭은 닉에 비해 젊고 아름다운 코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닉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어쩌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집안 전기를 나가게 해 실패하고 만다. 두 사람은 살인을 저지를 생각을 했던 것을 후회하며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2주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코라는 닉에 의해 아이를 가지자고 종용받는 중이었고, 결국 두 사람은 다시 공모해 닉을 사고사로 위장해 살해한다. 두 사람의 계획은 상당히 훌륭했지만 검사의 의심을 피하지는 못했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둘 다 결국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패트릭이 검사의 압박으로 코라를 고소한다는 서류에 서명했었던 것과, 코라가 그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함께 범죄를 공모한 사실을 자백한 진술서를 써서 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을 전처럼 사랑만 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의 범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행동을 두려워했고, 감시했다. 그러나 코라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둘은 극적으로 화해하고 결혼식까지 올리며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으나 결혼식 이후 수영을 하다 몸이 안 좋아진 패트릭이 코라를 병원으로 데려가려다 교통사고가 나서 코라는 즉사하고 패트릭은 결국 닉과 코라를 의도적으로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당한다.

줄거리만 보면 나쁜 놈은 벌을 받는다, 는 권선징악의 전형적인 주제를 따르는 로맨스+범죄 소설 같지만, 책을 직접 읽어 보면 패트릭과 코라의 사랑과 그들에게 벌어진 비극을 상당히 안타깝게 느끼게 된다.

2.

패트릭과 코라는 분명히 죄를 저질렀다. 보통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으면 “그래, 잘 됐다” 하고 통쾌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들의 비극적인 파멸에는 왜 가슴이 먹먹해지는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당히 먹먹했다.) 두 가지 정도의 이유를 찾아 보았다. 찾아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름 내 윤리관과 도덕관이 엄격한 편이라고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 사람들을 왜 이렇게 쉽게 용서하게 됐는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 ‘닉’이 사건의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딱히 좋은 사람으로, 즉, 동정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패트릭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결말을 보면 알겠지만, 이 소설은 패트릭이 감옥에서 작성하는 회고록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의 시선에서 닉은 코라에 어울리지 않는 늙고 느끼하고 눈치 없고 코라를 함부로 대하는 구석이 있는 남편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개저씨’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물론 그게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러나 닉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삶이 소설 속에서 묘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독자로 하여금 그를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두 사람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인물 정도로 받아들이게 했을 수 있다.

2️⃣ 두 사람은 살인 이후에 상당히 고통받는다. 아마 코라는 그 전부터 고통 받아 왔던 것 같다.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인 닉을 혐오하고 있었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멋대로 대하는 남편이 짜증나기는 할 것이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말했듯이 그게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여성들이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기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기는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리고 살인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 전에는 오직 사랑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서로를 의심하기까지 해야 했다. 패트릭은 코라가 자백 진술서를 다시 제출하지 않을까 두려워 했고, 언제 다시 검사나 변호사가 찾아와 자신들을 협박하지 않을까 두려워 했다. 코라는 패트릭이 자신을 떠나거나,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다 극적으로 화해한 직후, 코라는 패트릭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교통사고로 끔찍하게 죽었고, 패트릭은 자신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코라의 의심(패트릭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실현된 것에 대해 괴로워하다 교수형을 당했다.

두 사람은 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지만, 그 결과로 그 자신들 역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것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칙에 따라 죗값을 치렀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죽음에서 죄는 덜어지고 사건이 벌어진 양상의 비극성만 남는 것이다. 아마 안타까움의 원인은 이것이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심리학 박사는 아니라 확언은 못 하겠다. 윤리와 감정의 괴리에서 오는 이 괴로움을 더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아신다면 부디 좀 전해주시길.

3.

소설의 형식적인 부분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 보자면, 솔직히 책 맨 뒷표지의 소개글에는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많았다. 일단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낸” 소설이라는 부분. 현실에서는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여전히 권한대행으로 있지도 않은 권한을 행사하는 한덕수 국무총리나 내란의 힘 국회의원들만 봐도 그렇다. 어쨌든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패트릭과 코라는 나름 응당한 값을 치렀다.

그리고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마치 타블로이드 신문의 기사처럼” 썼다는 부분도 솔직히 공감이 안 갔다. 근래에는 담백한 묘사의 소설이 많으니 이미 이런 서술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기사 같다거나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격정적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아주 딱딱하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문체라고 생각한다. 패트릭과 코라가 대화를 나누는 부분을 보면 상당히 낭만적이고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그 외에 문장이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것 역시 이 책의 장점이 될 것이다.

4.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제목의 의미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포스트맨의 포 자도 등장하지 않아서 좀 뜬금없다는 느낌도 든다. 집배원을 겪어 본 세대가 아니라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포스트맨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다면 그것도 댓글로 좀 부탁드린다.

그래서 포스트맨은 모르겠고, 벨을 두 번 울린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두 번, 이라고 하면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 건의 사망 사건이다. 하나는 닉의 사망, 하나는 코라의 사망이다. 전자는 두 사람이 저지른 죄이고, 후자는 두 사람이 치른 죗값이다. 두 번의 벨을 두 사건을 은유하는 것으로 본다면 제목의 의미는 저질러진 악행에 대해 필연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대가라거나, 결국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이 태어나서 그 원죄로 죽고 마는 (그리스도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혹은 기회를 두 번 놓쳤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처음 법정에서 죄를 자백할 기회, 후반부에 변호사측 사람이 찾아와 협박했을 때 자백할 기회 이렇게 두 번이 두 사람에게 주어졌었다.)

사랑이라는 말로 면피할 수 없는, 살인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한 두 사람이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한참 안쓰러움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읽고 싶을 때 추천한다.
“그런 짓을 해도 괜찮을 것처럼 말하네.”

“당신과 나 빼놓고 괜찮은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

“당신과 나.”

-29p.
닉에 대한 살인을 모의할 때 패트릭과 코라가 나눈 위 대사는 초반에 등장하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당신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갈등하고 파멸을 맞이한다. 현실에 적용해도 그렇다. 아무도 모르는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나”는 속일 수 없다. 그러니 어쨌든 양심적으로 삽시다, 여러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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