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미래를 설계하는 외계인-일론 머스크, 천재 또는 괴짜의 두 얼굴
외계인이 아닐까? 일론 머스크 그의 천재성에 때론 열광하고, 괴짜이다 못해 괴팍한 언행에 때론 썩소를 짓게 된다.
우리는 일론 머스크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혁신가’, ‘천재’, ‘괴짜’, ‘구원자’, 혹은 ‘파괴자’. 그에게 붙여진 이름들은 늘 극단을 오간다. 그는 인류를 화성으로 보내려 하고, 인간의 뇌에 칩을 심으려 하며, 지구의 에너지 시스템을 바꾸려 한다. 그의 스케일은 너무나 거대해서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 손쉬운 ‘분류’의 틀에 가두려 한다. 마블 영화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처럼 말이다.
하지만 ‘천재’나 ‘혁신가’라는 이름표는 그의 기이한 행동과 예측 불가능한 변덕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단순화하고 신화화할 뿐이다. 이 이야기는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대신, 그를 둘러싼 무수한 ‘분류’들이 그의 존재 방식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추적하는 탐정적 관점의 이야기다.
그의 실체는 어쩌면 ‘천재’라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세상을 끊임없이 재분류하고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충동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그가 태어난 날에 새겨진 에너지의 지도는 이 거대한 불균형과 충돌의 드라마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론 머스크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그가 갑신(甲申)일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갑목(甲木)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오르는 거대한 나무의 기상이다. 자존심, 리더십, 개척 정신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무대인 월주(月柱)에는 또 다른 갑목(甲木)이 나란히 서 있다. 甲과 甲이라는 두 개의 거목이 경쟁을 통해 승패가 갈리 듯, 하나의 세상에 두 명의 리더는 존재하기 어렵다. 이는 명리학에서 ‘비견(比肩)’이라 불리는 관계로, 내 옆에 나와 동등한 존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이는 협력과 경쟁의 관계로 나타나지만, 머스크의 경우 이 ‘비견’은 극단적인 자기 확신과 세상의 모든 경쟁자를 ‘넘어서야 할 또 다른 나’로 인식하는 무의식적 코드로 작동한다. 세상의 기존 질서와 권위는 그에게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경쟁자인 셈이다.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를 조롱하고, 기존 자동차 산업을 비웃으며, 정부 기관을 불신하는 그의 태도는 단순한 오만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갑목’들을 향해 벌이는 끊임없는 선전포고에 가깝다. ‘천재’라는 분류는 그에게 영광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경쟁자들을 굴복시켜야만 유지할 수 있는 치열한 싸움의 명분이다.
그의 4차원적 세계관은 단순한 경쟁심을 넘어, 안정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재조립하려는 근원적인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의 에너지 지도는 한마디로 ‘전쟁터’다. 그는 한여름(오월, 午月)에 태어난 나무(甲木)다. 나무는 성장을 위해 물(水)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그의 삶을 둘러싼 물은 차가운 바닷물(해수, 亥水)이다.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의 만남은 엄청난 증기압을 만들어내며 모든 것을 폭발시킬 듯한 불안정성을 잉태한다(수극화, 水剋火).
더욱 격렬한 충돌은 다른 곳에서 벌어진다. 그 자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나무(甲木)는 날카로운 바위와 쇠(신금, 申金)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쇠는 나무를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에너지다(금극목, 金剋木). 이는 ‘편관(偏官)’이라 불리는 십성으로, 자신을 극단적으로 통제하고 파괴하는 카리스마와 스트레스를 의미한다. 즉, 그의 내면에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낡은 자신을 파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학적인 완벽주의가 내재되어 있다.
기존의 자동차 산업(오래된 나무)을 전기차(새로운 에너지)로 베어버리고, 인류의 현재(지구)를 화성 이주(미래)로 대체하려는 그의 모든 프로젝트는 이 내면의 ‘파괴와 창조’의 충동이 바깥세상으로 투사된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그를 미래를 만드는 ‘혁신가’로 분류하지만, 그 행위의 본질은 현재의 안정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파괴하고 재건설해야만 하는 내면의 전쟁과 더 닮아있다. 그는 미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견딜 수 없어서 미래로 도망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예측 불가능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돈, 즉 재물(財物)을 다루는 방식이다. 비트코인을 샀다가 팔고, 트위터를 인수했다가 ‘X’로 바꾸는 등 그의 행보는 합리적인 기업가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그의 사주에서 ‘재물’을 상징하는 토(土)의 기운이 ‘편재(偏財)’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편재’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월급(정재, 正財)과 달리, 스케일이 크고 예측 불가능한 사업적 재물이나 투기적 재물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이 ‘편재’가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 즉 시주(時柱)에 거대한 산(무진, 戊辰)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인생의 목표와 결과가 안정적인 부의 축적이 아니라, 돈을 지렛대로 세상을 뒤흔드는 거대한 ‘게임’ 그 자체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에게 돈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가 돈을 쓰는 방식은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 블록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부수기를 반복하는 놀이와 같다. 사람들은 그의 변덕에 ‘괴짜’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정작 그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놀이터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합리적 경영인’이라는 분류는 애초에 들어맞지 않는 옷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일론 머스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천재’, ‘혁신가’, ‘괴짜’라는 수많은 이름표를 붙여보지만, 그는 언제나 그 분류의 틀을 비웃듯 빠져나간다. 어쩌면 그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그를 분류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경계와 질서를 허물고 재조립하려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현재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파괴하도록 만드는 시시포스에 더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좋든 싫든, 그가 밀어 올리는 거대한 바위가 굴러 내려올 세상에 살고 있다. 그를 신화화하거나 악마화하는 대신, 그의 존재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 즉 ‘안정적인 현재를 파괴하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이 분류 불가능한 존재를 대하는 우리의 유일한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