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막 - 신인감독 육성 시뮬레이션
세상에는 ‘본투비(Born to be)’라는 편리한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의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 우리의 언어가 무력해질 때, 우리는 그를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으로 봉인해버린다.
부동의 세계 1위의 배구선수 김연경은 아마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에서 이 봉인을 가장 많이 당한 인물일 것이다. 코트를 찢는 스파이크, 불가능해 보이는 수비, 불타는 승부욕.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월드클래스 김연경’이라는 이름의 완성품으로 소비해왔다. 하지만 잠깐, 정말 그럴까? ‘월드클래스’는 과연 명품처럼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지독한 반복 훈련 끝에 겨우 득템하는 희귀 아이템 같은 것일까.
모든 게임이 그렇듯, 시작은 캐릭터 생성창이다. 김연경이라는 캐릭터의 기본 스탯을 인문명리학적 언어로 잠시 해킹해보자. 베이스는 ‘신금(辛金)’, 날카롭게 벼려진 보석이다. 이 캐릭터의 특징은 완벽주의, 섬세함, 그리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여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본능적 욕망이다.
흠집 난 보석이 가치를 잃듯, 이들에게 패배나 실수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자존심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 ‘어떻게 내가 져?’라는 생각은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 설정값에 가깝다.
여기에 사회적 활동, 즉 메인 퀘스트의 성격이 ‘정재(正財)’로 설정되었다. 이것은 ‘땀 흘려 번 돈이 최고’라거나 ‘안정적인 월급이 좋다’는 식의 단순한 재물운이 아니다. 오히려 ‘과정의 성실함을 통해 예측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대한 선호도다.
즉, ‘이만큼 연습하면 이만큼 강해진다’는 정직한 성장 서사를 가장 편안하게 여기는 타입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나 재능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 플레이어를 극도로 혐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세계에서 ‘결과’는 ‘노력’의 동의어이며, 노력하지 않고 얻는 승리는 버그 플레이에 가깝다.
이 두 가지 설정값, ‘완벽을 추구하는 보석(辛金)’과 ‘정직한 결과물을 신봉하는 실천가(正財)’가 결합하니 어떤 캐릭터가 탄생했는가? 바로 수만 번의 스파이크 연습을 통해 자신의 몸을 가장 완벽한 공격 무기로 ‘수행’하고, 그 무기로 승리라는 결과물을 차곡차곡 쌓아 ‘월드클래스’라는 칭호를 획득한 레전드 플레이어, 김연경이다. ‘월드클래스’는 그의 본질이 아니라, 지독한 반복 수행의 결과로 획득한 ‘업적’이자 ‘칭호’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레전드 플레이어에게 갑자기 ‘신인감독’이라는 이름의 강제 확장팩이 깔렸다. 문제는 이 확장팩의 장르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혼자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액션 RPG였다면, 이제는 여러 캐릭터에게 명령을 내려 전략을 짜는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RTS)이 된 것이다. ‘신인감독 김연경’이라는 프로그램은 바로 이 장르 부적응의 순간을 생중계하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처절한 기록이다.
가장 큰 문제는 ‘명령어 충돌’이다. 선수 김연경의 몸에 각인된 명령어는 지극히 단순하고 효율적이다. “공이 오면, 때린다.” “블로킹이 보이면, 꺾어 때린다.” 수백만 번의 반복 수행을 통해 이 명령어들은 거의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실행된다. 그런데 감독이 된 그는 이제 이 명령어를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캐릭터(선수들)에게 ‘언어’로 전송해야 한다. 여기서 비극, 아니 희극이 시작된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아니 그걸 왜 못해?”라거나 “그냥 하면 되는데” 같은 말들은, 사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숨 쉬는 법을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것과 같다. 너무나 당연하게, 몸으로 체화된 ‘수행’의 영역을 굳이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 자체를 어색해하는 것이다. ‘월드클래스’라는 정체성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몸으로 ‘수행’되는 것이었기에, 그의 언어는 자꾸만 길을 잃고 헤맨다.
결국 감독 김연경에게 주어진 새로운 퀘스트는 ‘번역가’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수행의 언어’를 선수들이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선다. 선수 시절에는 필요 없었던 새로운 스킬 트리를 찍어야 한다는 의미다.
첫째는 ‘공감하기(Empathy)’. 나에게는 너무나 쉬운 동작이 저 선수에게는 왜 어려운지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나처럼 해봐’라는 전지전능한 신의 시점에서 내려와, 각기 다른 하드웨어(신체조건)와 소프트웨어(재능)를 가진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둘째는 ‘기다리기(Patience)’. 한 번의 설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보석을 깎듯, 선수가 성장하기까지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반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결과물을 사랑했던 ‘정재’ 캐릭터에게 ‘기다림’이라는 시간 개념은 가장 배우기 어려운 마법과도 같다.
‘감독 김연경’의 정체성은 이제 코트 위에서의 화려한 스파이크가 아니라, 벤치에서 선수들을 향해 던지는 말 한마디, 격려의 눈빛, 그리고 함께 축하하는 작은 제스처들을 통해 새롭게 ‘수행’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한 명의 위대한 플레이어가 자신의 기존 정체성을 해체하고, 서툴지만 진솔한 반복 수행을 통해 ‘리더’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중이다. 이 버벅거림과 성장통이야말로, ‘본투비 월클’이라는 신화를 깨고 ‘만들어지는 리더’의 가장 인간적인 증거다. 그의 새로운 시뮬레이션 게임이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할지, 팝콘을 들고 지켜볼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