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따라 걷는 길

서울둘레길 21코스 완주기

by 올리브

서울을 한 바퀴 걸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는다. 그 길은 지도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궤적이었으니까.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던 날, 나는 내 안의 무거움을 내려놓으려 걸음을 내디뎠다. 계절의 결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두 번 물고기자리 휴무인 월요일에 조용히 길을 나섰다. 가게를 벗어난 하루는 내게 또 다른 쉼이었고, 빠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걸을수록 겨울 속 얼어 있던 마음도 봄과 여름을 지나며 천천히 풀렸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어느새 서울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서울을 한 바퀴 잇는 157km의 길, 21개 구간으로 나뉜 ‘서울둘레길’은 서울 외곽의 산과 하천, 숲과 마을을 잇는 순환형 도보길이다. 도봉산에서 시작해 북한산, 불광천, 한강, 관악산, 안양천을 지나 다시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서울의 경계를 걷는 동시에 나를 쉬게 하는 길이었다.



시작은 서브현옥 님과의 인연이었다. 15년 넘게 마라톤을 꾸준히 해온 그녀와는 3년 전 아침 미라클 모닝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가 보내주는 필사 시를 따라 쓰며 아침을 함께 연지 200일이 넘었다. 새해부터 시작한 필사는 그녀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문장을 따라 써 내려가며 마음의 결이 닮아가는 경험은 깊은 친밀함을 만들었다.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고, 비슷한 리듬으로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마음의 결도 자연스레 닮아갔다. 현옥 님은 은퇴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그 꿈은 매년 내가 산티아고로 향하는 마음과 닮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바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제안했다.

“우리 가끔 대한민국 둘레길을 하루 꼬박 걸어보는 거 어때요?”

그렇게 여기저기 검색을 하다가 도심과 자연이 어우러진 서울둘레길에 함께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나의 휴무에 맞춰 발걸음을 맞춰주는 현옥 님의 배려 덕분에 길 위의 동행은 언제나 편안하고 고마웠다.



서울둘레길에는 모바일 전자여권 앱을 통한 인증 시스템이 있다. 각 코스마다 지정된 지점에서 인증 도장을 찍으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기록할 수 있다. 디지털 속 도장은 꼭 나에게 칭찬해 주는 작은 박수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인증받은 도장을 다시 볼 때면 그날의 걸음과 생각이 고스란히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걸음은 겨울의 차가움에서 시작해, 봄의 연둣빛과 여름 햇살을 따라 이어졌다. 길 위엔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함께했다. 연둣빛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피어나고, 하얀 목련이 가지 끝마다 조심스레 몸을 열었으며, 진분홍빛 철쭉은 바람에 흔들리며 봄의 끝자락을 알렸다.

길을 걷다 마주한 식탁은 매번 잊을 수 없는 잔치였다. 속을 뜨끈하게 풀어주던 김치 송송, 면발 쫄깃한 칼국수 한 그릇, 구수한 향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던 진한 맛의 청국장, 한입 가득 넣으면 고소한 참기름향과 나물들이 입안에서 춤추는 비빔밥, 노릇노릇 구워 입맛을 당기는 파전, 따르는 순간부터 기분이 몽글해지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까지 걷느라 지친 다리를 잠시 쉬게 하고 몸도 마음도 절로 웃음 짓게 되는 맛의 쉼표였다. 따뜻한 식탁들 덕분에 걷는 길은 늘 배부르고 행복했다. 계절도 풍경도 함께한 이의 마음도 그날의 공기와 함께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함께 시작해 걷은 날도 있었지만 서로의 일상이 달라 후반부는 각자 걷기로 했다. 그 시간도 참 좋았다. 누구의 시선도, 소리도 없이 나는 나를 조용히 마주할 수 있었다.

도봉산의 바위 능선을 넘고, 북한산의 품에 안기며 흙길을 따라 걸었다. 한강변의 바람은 마음을 씻어주었고, 관악산의 돌계단은 몸의 중심을 다시 세워주었다.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신발을 벗어 들고 안양천 하류를 지나는 14코스 황톳길이 가장 즐거웠다. 맨발로 흙길을 딛는 감촉이 얼마나 부드럽고 시원하던지 발이 먼저 걷고 마음이 따라가는 듯했다. 세상 가장 순수한 놀이터를 만난 기분이었다. 촉촉한 흙이 내 발을 간질이며 ‘괜찮아, 천천히 가도 돼’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서울을 걷는 길인데도 어떤 순간엔 도시라는 걸 잊게 되는 고요한 숲과 풍경이 이어졌다.

도시의 경계에서 걷다 보면 머릿속은 비워지고, 마음속은 채워졌다. 하고 싶은 일, 미뤄둔 마음, 잊고 있던 나의 꿈과 진심이 걸음 따라 하나씩 떠오르고, 또 하나씩 내려앉았다.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는 삶의 여백이었고, 내면의 소음을 정리할 수 있는 긴 숨이었다.


나는 지난 6월 23일 마지막 구간의 걸음을 마치고 모바일 인증서를 받았다. 현옥 님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엄지 척을 보내왔다. 다음 날 그녀도 일정을 마무리했다며 인증서를 사진으로 보내왔다. 그녀는 상반기 나에게 둘레길 완주라는 선물을 할 수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서로 다른 걸음이었지만, 같은 길 위에서 이어진 마음이 참 따뜻했다. 완주라는 단어보다는 무사히 잘 걸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도전이 아니었기에 더 깊고 진한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 견뎌냈다고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냈다고

그리고 언젠가

또 마음이 지칠 때

이 길을 다시 걸어보리라.

걷는 동안 서울의 길이 나를 안아주었으니까.

걷는 일은 내 안에 흔적을 남긴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천천히 걷고 있을 누군가의 마음에 이 길의 풍경이 작은 위로로 닿기를


[ 서울둘레길, 알고 걸으면 더 좋은 길 ]

157km, 21개 코스로 구성된 서울둘레길은 서울의 외곽 산과 하천, 숲과 마을을 따라 도는 순환형 도보길입니다. 도봉산을 시작으로 북한산, 불광천, 안양천, 한강, 관악산을 지나 다시 도봉산으로 이어지며 서울의 경계를 천천히 밟아갑니다. 길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어 누구나 걸을 수 있지만, 코스마다 거리와 난이도가 다르기 때문에 계절과 몸 상태를 고려해 나에게 맞는 속도로 걸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 인증하는 즐거움 – ‘서울둘레길 전자여권’ ]
서울둘레길에는 모바일 인증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스탬프투어 서울둘레길’ 앱을 설치하면 각 구간별 인증 지점에서 QR코드를 스캔해 전자 도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걸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은 보람이자 나만의 여정 기록이 되어줍니다. 21개 코스를 모두 인증하면 서울시에서 발급하는 완주 인증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청은 서울둘레길 홈페이지에서 가능)


[ 걷는 팁 한 가지 ]
모든 코스를 순서대로 걷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늘 나의 시간과 기분에 맞게 숲이 많은 구간, 강이 흐르는 구간, 혹은 도심 속 골목을 잇는 길을 선택해도 좋습니다.
* 중요한 건 완주보다, 그 걸음 안에서 나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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