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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Crevasse), 빙하나 눈에 생긴 깊은 균열. 멀리에서 보면 장관이고 서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차가운 얼음 사이 크랙은 깊이를 알 수 없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밤이나 눈보라가 칠 때는 내딛는 발걸음마다 공포와 안도의 반복이 끝없이 이어지게 됩니다.
요즘 어떤 한 직업군이 마치 크레바스를 건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크레바스에 걸쳐진 사다리는 휘청거리고 그 위를 기어가는 사람들의 중심도 따라 흔들립니다. 영화 속 장면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완전한 악인이 아니라면 우선은 모두 무사히 건넜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틈인데 빙하에 생긴 크레바스는 죽음이고 암벽에 생긴 틈은 생명입니다. 멀리 깎아지른 거대한 돌산 벽면에 개미만 해 보이는 암벽등반가들이 보입니다. 한동안 꼼지락꼼지락 사지를 움직였는데도 제자리 같아 보입니다. 왜 오르는지를 묻기 전에 우선 떨어지지 않고 무사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크레바스를 건너는 사람들에게는 사다리라도 있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맨질맨질하고 수직에 가까운 벽면에 매달려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멀리서 보면 맨질맨질해 보이지만 암벽에는 크랙이 있습니다. 멀리에서는 보이지 않을 뿐이죠. 암벽등반가들은 바위의 갈라진 틈, 크랙을 찾아내고 그 틈에 손가락이나 너트(nut: 바위의 갈라진 틈에 끼워 넣는 장비)를 끼워 넣으며 크랙을 따라 오릅니다. 크랙은 암벽이 허용한 길, 루트입니다.
어느 산에나 정상은 있습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만이 가지는 기쁨이 강하니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는 거겠죠. 똑같은 정상이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사람과 암벽등반을 해서 오른 사람이 정상에서 느끼는 건 다를 것 같습니다. 설사 정상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사람의 마음은 어렵지 않게 그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암벽등반으로 오른 사람의 심정은 헤아리기가 조금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회라는 시스템에도 정상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평등한 사회가 돼도 소득의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라는 바람과 시간이 깎은 암벽은 수직으로 높이 솟아 암벽 아래에서 보면 까마득한 정상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사회가 팍팍해질수록 암벽은 더 가팔라지고 점점 더 수직에 가까워집니다. 빡빡한 사회가 되었다는 건 산허리 한참 아래부터 깎아지른 절벽이 시작된다는 뜻이고 누구나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완만한 길도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전에 있던 그 완만한 길도 보기보다는 훨씬 힘들었고 누구나 중턱까지 오르지도 못하는 길이었지만요.
아예 정상 부근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제외하면 이젠 정상 근처에 오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워졌습니다. 가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이 생기지만 그 케이블카가 언제 출발하는지 아니 심지어는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도 알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럼 정상은 그냥 포기해야 맞는 걸까요? 정상이나 근처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은 그저 탐욕이고 인정받을 수 없는 이기심으로 치부돼야 할까요?
암벽등반은 한 번만 실수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고 또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가는 것도 어렵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으면 보상은커녕 살아남는 것도 힘들어지는 길이라 웬만하면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암벽이 제공하는 크랙은 가늘고 몇 개 되지 않지만 압력밥솥에 난 작은 구멍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암벽이 와르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 허락된 유지장치인 거죠.
암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든 틈에 너의 모든 걸 걸고 올라봐. 최소 10년 동안은 너는 그 틈에 손을 끼워 넣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 그런데 그건 시작일 뿐이야. 암벽의 중간지점을 통과하고도 너는 그 틈에 온몸이 대롱대롱 매달리며 살아야 해. 대신 너는 쓸 수 없지만 저 아래 까마득한 암벽아래에서 너와 영혼을 함께 하는 네 가족이 풍요롭게 쓸 수 있는 돈을 뿌려줄게.
그렇다고 나를 이상하게 보지도 말고 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최소한 틈에 손을 끼워 넣을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은 나름 공정하니까. 부모 찬스도 있다지만 그래도 공부라고 말하는 결과 순서대로 기회를 주니까.
이제 이 작은 틈이 유일한 길이란 걸 거의 모두가 알아버렸고 학업능력 순서대로 주어지는 등반 기회를 놓치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 생각해 봐 지금 이 세상에 최소한 이렇게 기회라도 제공하는 시스템이 몇 개나 남아있는지.
아~! 근데 한 가지 더 알려줄게. 암벽에 오르는 순간 너는 뛰어난 머리로 사는 사람에서 오직 몸으로, 그것도 끝마칠 때까지 정해진 시간과 날짜의 변화가 없는 육체노동자로 변신할 거야. 너는 수도 없이 틈에서 손을 빼고 싶은 마음이 들 거고 절벽에 매달려 자야 하니 불면증도 찾아오기 쉬울 거야.
내가 만든 틈은 공정한 사회를 위해 남겨둔 내 마지막 호의야. 그 틈이 크레바스가 되는 사회가 되길 원해? 그럼 언제든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너희는 아직도 세상은 공정하고 살만하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야. 그리고 너희가 정상부근에 다다른 걸 멀리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지나온 길은 보이지 않을 거야. 왜냐면 너희는 정상에서 태어나 아예 살고 있는 사람들 대신 보이는 존재니까. 깎아지른 절벽에 들러붙은 작은 생명체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 잡기엔 너무 훌륭하고 경이롭지. 그리고 너희가 쉽게 오른 사람이 되는 것도 한편 나쁘진 않아. 사회란 원래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풀어내는 방법도 제공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