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가고시마 버킷리스트 골프장
인간이 사라진 너무 깊은 자연에 들어서면 두렵다 외로워진 후 다시 두려워집니다. 저만 그런 걸까요? 삶의 충격파를 털어내거나 흐트러진 삶을 정리하고 정돈하기 위해 자연을 찾을 때조차 사람의 발자취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 혼자라면 어렵습니다. 누군가 나를 비추는 한 사람이 그래서 필요하고 그래서 그런지 사랑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또 다른 사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깊은 자연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고 또렷한 선(線)과 흐릿한 금, 투명한 막(幕)이 존재하는 지역입니다. 외로움이 찾아와도 죽을 만큼 고독해지지 않는 곳. 명치 바로 위에서 솟은 감성이 가슴을 타고 흐르며 뻐근해지는 선(線), 자연으로 인간이 삼투되며 마음이 맑아지고 막(幕). 말라 쭈글 해진 마음 한편에 연둣빛 새순이 돋을 수 있는 지역. 바로 골프장입니다. 역시 저만 그런 걸까요?
자연마저 힘을 잃고 어수선 해지는 인파가 많은 곳은 오히려 힘이 듭니다. 같은 골프장이라도 27홀 이상 규모는 조금 덜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안락하고 즐겁고 도전과 성취가 있는 골프도 좋지만 이젠 삶이 가진 유한함 때문에 처절하게 아름다운 삶이 느껴지는 골프가 점점 더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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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리(喜入) CC는 골프장이기도 하지만 자연에난 18개의 틈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연과의 경계에 설 수 있는 기회를 18번이나 제공하는 곳입니다. 본질 간의 경계에서 삶은 꽉 차 오르기 쉽습니다. 18번이나 생(生)을 꽉꽉 채워주는 키이리. 어메이징(amazing) 키이리입니다.
키이리 CC도 노모자키를 설계한 카토 슌스케의 작품입니다. 슌스케의 자연주의 철학은 키이리 CC에서 경계라는 단어로 실천된 것 같습니다. 하늘, 바다, 땅, 산, 숲은 서로가 맞닿아 있을 때, 경계가 선명해서 분리도 되지만 동시에 어울림으로 훨씬 더 아름다워집니다. 자연은 상대를 누르고 퇴색시켜야 돋보이는 인간의 돋보임과는 반대로 작용합니다.
키이리 CC의 노출된 땅에는 주름도 많고 도톰하고 낮은 둔덕도 많습니다. 경사면은 마치 거인이 엄지와 검지로 지표면을 살짝 꼬집은 것처럼 굵은 주름으로 울리불리합니다.
홀의 경계선과 숲 사이에 공간이 가파르지 않은 곳은 작지만 시간이 묻힌 무덤처럼 분명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이어지며 봉긋봉긋 땅 너울이 이어집니다. 그린 주변도 우유 한 방울이 떨어져 만든 왕관처럼 몽글몽글 솟아 있습니다. 나무가 무성한 산 자락 경사면이 오히려 편평합니다. 자연의 만남은 결코 직선이 될 수 없음을 알려주려는 슌스케의 웅변 속에서 홀(hole)들도 골퍼도 자연에 스며듭니다.
키이리의 홀들은 자연과 만나는 경계를 허물어 결국 자연에 녹아듭니다. 페어웨이는 숲과의 경계로 자연스레 산과 바다, 하늘의 일부가 됩니다.
키이리의 9번 홀은 제 골프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홀 중의 하나입니다.
8번 홀을 출발한 카트가 언덕을 올라 짧은 숲터널을 통과하면 9번 홀 티잉 그라운드가 있는 능선입구로 진입합니다. 터널을 빠져나가면 정상에 오른 케이블카처럼 갑자기 왼쪽 산비탈 아래로 지나온 홀들이 펼쳐집니다. 좁은 능선이라 더 과장되게 시선이 낙하합니다. 그리고 그 땅 끝에서 이어진 바다를 따라 멀어지던 시선은 수평선을 통과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온통 먼바다와 가까운 하늘뿐이었는데 이륙 후 고도를 확보한 비행기가 선회하며 항로를 잡듯 카트가 오른쪽으로 휘어져 들어갔습니다. 시선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았습니다. 멀리 클럽하우스의 하늘색 삼각형 지붕을 저격한 시선이 산 아래 까마득한 9번 홀 페어웨이로 툭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고저차가 심한 티잉에어리어에서 산 아래 페어웨이로 티샷을 날렸던 홀을 꽤 경험했지만 키이리 CC의 9번 홀 같지는 않았습니다.
키이리의 9번 홀은 쳐다보면 볼수록 마음의 전압도 전류도 강해졌습니다. 능선을 따라 급하게 내려가다 경사가 완만해지고 그러다 평지에 다다르는 페어웨이는 깎거나 돋운 흔적이 느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 인 것 같았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홀에서는 아무리 큰 충격도 금세 소화되고 해석되어 남겨지는 여운과 감동이 적은데 키이리의 9번 홀은 아무리 오래 쳐다봐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9번 홀과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내리막 홀, 13번 홀도 대단합니다. 11번 홀과 12번 홀은 돌의 배치로 홀 안에 자연의 경계를 초대한 것 같은 느낌이 물씬한 홀들인데 짙은 회색 화산석이 시선을 잡아당겨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홀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차분해졌던 마음이 짧은 오르막을 타고 넘어 13번 홀에 들어서는 순간 폭발하며 사방으로 튀어 오릅니다. 더 이상 시원하게 트이기 힘든 공간에 상쾌하고 장쾌하기까지 한 장면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번 마지막 홀은 아웃코스와 마찬가지로 파 5입니다. 슌수케는 마지막 18번 홀에서는 뭔가 더 차분해서 정돈하고 정리하는 기회를 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연못 가장자리 검은 돌과 흰돌이 만든 띠의 강열한 대비로 더 도드라져 보이는 그린. 깎아낼 수도 없고 돋울 수도 없는 물이 만든 일정한 수면 사이에 놓여 더 또렷한 마지막 홀 그린. 덤으로 작은 백사장 같은 벙커 하나. 18번 홀이 남긴 차분함과 여운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그렇게 18홀을 마치고 종이학 같이 날개를 펴고 하늘색 삼각 모자를 쓴 스패니시 기와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키이리 CC는 가고시마시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사쓰마 반도(薩摩半島) 남단에 있는 골프장입니다. 이부스키 카이몬 GC(いぶすき ゴルフクラブ開聞コース)에 이어 큐슈에서 두 번째로 가장 남쪽에 있는 골프장이라 겨울에도 무척 따듯한 골프장일 것 같습니다.
설계자가 같다 보니 키이리 CC도 노모자키 GC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두 군데 모두 자연의 아름다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고 무척 넓은 면적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골프장입니다. 두 골프장 모두 카토 슌스케의 설계가 빛을 낼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가진 곳인 것 같습니다. 충분한 면적 덕분에 모든 홀들은 방해 없이 자연과 따로따로 섞여 들어갈 수 있었고 그래서 각각의 홀들은 전혀 다른 감동을 품고 있습니다.
아~! 또 한 가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아주 긴, 홀 간 혹은 클럽하우스와 스타트 홀까지의 이동거리입니다. 자연이 깊고 그런 깊은 자연을 최대한 보전하고 싶은 결심이 없었다면 없거나 짧아졌을 이동거리. 난대성 식물터널에 함몰되는 유별난 경험도 두 골프장이 가진 매력입니다.
그린피는 주중은 식사와 카트 포함 7만 원 내외면 가능하고 주말에도 10만 원대 초반이면 가능합니다. 라쿠텐 고라에서 검색하면 더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린피는 주중기준 역시 10만 원이었고 관리 상태는 극상. 코스의 아름다움은 비교불가. 노모자키에 비해서는 조금 더 전략적인 홀들이 있고 조금 더 시적인 코스. 하지만 주변 경치는 노모자키가 압도적으로 더 좋은!
2년이 흘렀지만 키이리의 9번 홀에서 느꼈던 감성은 여전히 제 가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가끔 아니 드물게 그저 골프장일 뿐인데 어릴 적 엄마 품에서 느꼈던 따듯하다거나 안도감 같은 몇 개의 감정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감정이 차오르는 코스들이 있습니다. 플레이를 하고 나서 골프장의 설계자를 찾아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골프장은 설계자가 자신의 철학을 담는 도구이며 결과물이니까요. 물론 모든 골프장 설계자가 철학을 담을 수 있는지, 담고 싶은 철학이 있는지, 혹은 철학이라 부르지만 철학 다운 철학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누구나 골프장에서 감성이나 철학을 느낄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카토 슌스케. 자연 속에 숨어있는 그의 생각을 만난 그날, 그와의 대화가 아직도 떠오릅니다.
12번 홀 파3 티박스에서 보이는 거인의 돌무덤과 그 옆에 솟은 거인과 함께 사냥을 다니던 두 마리 충견의 무덤이 솟아 있습니다. 거인의 돌무덤 왼쪽으론 11번 홀 그린이, 멀리 호수 넘어 보이는 12번 홀 그린과 그린을 감싼 봉우리들이, 그리고 봉우리 경사면까지 타고 오른 벙커가 보여주는 아우트라인과 흰 속살, 한 편의 서사를 노래합니다.
그날의 감성들로 다시 가슴이 아련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