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상사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중사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 한다.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하사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그러므로 건언에 이런 말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고 진도는 물러서는 듯하며 평범한 도는 어그러진 것 같다.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상덕은 깊게 파인 골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진실로 깨끗한 것은 마치 때 묻은 것 같으며 광덕은 부족한 듯하다.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건덕은 구차해 보이고 질박한 덕은 변한 것 같다. 더없이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는 것 같고 큰 그릇은 완성된 모습이 없다.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대음은 소리가 없고 대상은 형상이 없다. 도는 무명에 숨어 있다. 무릇 도라는 것은 베풀고 이룬다. (제41장)
전한 시대 마왕퇴 백서본에는 '免'자로 표기되어 있고 전국 시대 곽점 초묘 죽간에는 해당 글자가 만(曼)으로 표기되어"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맞다. 어떤 것이 있어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면 대기면성(大器免成)에 대한 느낌이 와닿는지 모르겠다. 그 大器중 하나로서 과학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고 있다. 수 천년 간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왜곡되어, 실패하거나 늦게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고사성어로 잘못 쓰였다.
노자는 '도'의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구체적, 실천적 면을 말하고 있다. 상사, 중사, 하사로 나누어 사람들의 '도'에 대한 태도를 선명하게 잘 대비시켜 보여준다. 상사는 부지런히 실천하는 자들이고, 중사는 반신반의하는 자들이고, 하사는 비웃는 자들이다.
세상의 범속한 인간들이 이 하사에 속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람들은 '도'를 듣게 되면 우스운 말을 한다고 껄껄 웃는다. '도'가 어떻게 생긴 것이냐고 비꼬고, '도'같은 것이 있느냐고 오만한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노자는 '도'는 하사들의 이런 비아냥이 없으면 진짜 '도'가 아니라고 하니 노자의 유머감각이 남다른 데가 있다. '도'는 모두가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유명에는 없다. 모두에게 울림을 주는 말에는 '도'가 없다. 반드시 담백하니 맛이 없는 무명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유명은 마치 교언(巧言令色)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하다. '도'가 숨어있는 무명의 모습은 마치 어두운 듯하고 물러서는 듯하고 울퉁불퉁해 보인다. '덕'이 숨어있는 무명의 모습은 구차해 보이고 모가 없는 네모처럼 보이며 완성된 모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노자는 개념이 갖는 유용성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유용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구분해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유명을 설명하면서 가치개념과 비가치개념으로 분명하게 나누어서 적시했다면 이후의 사상발전에 큰 진전이 있지 않았을까? 훈고학적 해석에 익숙한 학자들은 비가치개념조차도 날마다 덜어내야 하는(爲道日損) 가치개념으로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개념을 만드는 것 자체가 자신의 내면 수양에 어긋나는 범도(犯道)라 여기고 터부시 한다. 아쉬운 일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 가치개념과 비가치개념을 나누는 기준은 증거의 유무에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道는 한마디로 하면 仁이다. 이 仁이 공자 당시에는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증거가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노자는 이 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는 것은 道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수준의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것이 필요했지만 노자는 당시 수준의 논리학이나 수학 또는 그 외의 관측으로도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사람을 옥죄지 말고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는 것을 설파한 것이다.
그럼 어쩌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당시에 받아들여졌을까. 그건 아마 통일제국을 장구하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유학의 가치개념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배권력은 仁만큼 효과적으로 제국을 운영하는 원리로 써먹기에 적당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杏仁은 '살구씨'를 말한다. 결국 仁은 '인간의 씨앗'이다. 즉 '인간다움'이다. 이 '인간의 씨앗'이 정말 있는지 현재까지도 증거는 없다.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사람들을 전제국가의 틀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게 한 것이다.
漢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는 유학을 숭상하고 농본주의를 지향했다. '孝'는 사람들을 '土地'에 묶어놓기 위한 것으로 孝는 仁의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다. 통일제국을 완성한 지배권력은 전제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체제분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商과 工을 중과세로 억압했다. 이는 工商을 불리하게 해서 반대로 農을 장려하는 효과를 얻었으며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토지에 묶어두기 위해서 자식들에게 땅을 골고루 나눠주는 분할상속제를 정착시켰다. 유학의 仁은 이 대목에서 필요했다. 땅을 상속받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자식들에게 '孝'를 강요한 것이다. 이후의 사회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독자들도 알다시피 士와 農만이 끝없이 양산되어 갔음을 잘 알 것이다. 그럼 사회분화를 막는 이런 전제성이 지금도 면면약존(綿綿若存)하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