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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Mar 16. 2024

입신양명 VS 惟道是從

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큰 덕을 가진 사람의 모습은 오로지 도를 쫒고 있다. 道라는 것은 눈이 부시거나 아니면 반대로 어둑어둑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눈부시고 어둑어둑한 그곳에 象이 있고 만물이 있다. 깊고 어두운 그곳에 精이 있다.


其精甚眞,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그 精은 참된 것이어서 그 안에 믿음이 있다. 따라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떠나지 않고 있으니 모든 만물의 처음을 알려준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내 어찌 만물의 처음을 알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제21장)


 덕을 가진 사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덕을 가진 사람의 풍모는 오로지 道만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도는 어떤 것인가. 도는 道隱無名이라 했듯이 무명에 숨어있다고 했다. 노자는 무명에 대한 이미지를 恍惚함이라 하고, 그 눈부심과 어둑어둑함 안에 有名이 있다는 것으로 도를 말하고 있다. 精은 유명이다. 증명(信)할 수 있는 유명이다. 유명은 오늘날의 소위 '개념'이라는 것에 해당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했으니 노자의 도는 만물의 법칙을 말한다. 그러므로 덕을 갖춘 사람의 정체는 만물의 법칙을 캐는 사람일 것이다.


 한·중·일 삼국은 모두 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유교가 가르치는 인생관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다. 우리는 출세 지향적이며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그래서 회사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것 또한 지극한 선(善)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웬만큼 큰 반칙이 아니면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가벼운 권모술수 정도는 용인된다. 인생의 목표를 입신양명에 두고 있으니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입신양명은 남과 끝없는 다툼을 야기한다.

 입신양명은 기득권의 논리다. 입신양명의 논리에는 오로지 한 길만을 보여주고 그 길만 가도록 사람들을 경쟁시키는 기득권의 음흉한 의도가 숨어 있다. 정형화된 인간상을 제시해서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가도록 강요한 것이다.

 유교적 인간상은 학문을 열심히 닦아 벼슬길에 오르고 집안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난다. 오직 돈을 벌어 사장 소리를 듣거나 고위직에 오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이다. 아주 먼 옛날도 아니고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입신양명의 길에서 조금만 뒤쳐지기라도 하면 너무 낙심한 나머지 세상을 등지거나 인생을 폐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인생 별거 없다’는 말이 만고의 진리로 통하지만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입신양명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속세의 우리와 달리 구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달랐을까? 그들이 가는 구도의 길은 탐진치(貪瞋癡)에 빠지지 않기 위한 수행이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공부다. 탐진치를 제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집착을 없애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아집을 버리면 무아가 되므로 비로소 걸릴 탐진치가 없고 세상의 이치를 정확히 판단한다는 논리다. 마음에 묻은 때를 닦고 닦아 거울 같은 마음이 드러날 때까지 평생을 인내하고 정진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고 하는 수행자는 거의 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목표를 잘못 설정했다. 탐진치는 다스려야 할 야수의 마음도 아니고 닦아 내야 할 묵은 때도 아니다. 인간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이다. 탐진치는 ‘나’라는 자아의 일부이며 사람마다 고유한 것으로 가장 ‘나’다운 것이다. 부처님도 말하지 않았던가?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것이 ‘나’의 실체다. 인생이 고달픈 것은 탐욕을 부려서가 아니고 계획했던 일이 수틀린다고 히스테리를 부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획 없이 막살 수는 없다. 계획이 어긋나면 어느 순간에 놓아버리면 될 일이었다.

 아집을 버리고 자아를 죽이는 것을 수행 목표로 삼는 것 역시 기득권의 논리다. 유교의 인성론(人性論)에 오염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기득권은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산속의 수행승에게까지 강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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