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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Jun 19. 2020

1979년에서 날아온 일기장

방 청소를 하다가 낯선 상자를 발견했다. 한 20년은 넘은 것 같은 낡은 상자 속에는
40여 년 전, 1979년의 일기장이 들어있었다. 나의 엄마, 희옥 씨가 58년생이니 21살의 아가씨 시절 엄마의 일기였던 것이다. 순간 보물상자를 찾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방 청소를 하다 말고 쭈그려 앉아 우리 똑똑한 엄마, 수학 과외로 돈을 벌었다던 총명하고 똑똑한 내 마음속의 영원한 스타, 그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통곡하고 말았다.

< 딸을 기다리며... 딸을 위해 만두 속을 다지는 칼 소리에 무던히도 깊은 엄마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는다. 피곤한 얼굴 속에도 자식을 위해 희생의 고통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만은 평온하시다. 어찌 이런 분 앞에서 젊은 내가 피곤하다고 고통스럽다고 삶을 체념할 수 있을까? 묵묵히 자신을 지키며 고통의 표정도 웃음도 짓지 않으신 엄마의 길을.
조용히 그리고 순순히. 말은 필요하지 않다.
엄마의 그림자를 쫓아가야 한다. 그림자가 없어지면 그때는 이미 내 뒤에도 나를 따르는 또 다른 미숙한 꼬마가 쫓아오겠지. 나는 또 꼬마에게 등불이 되기 위해 묵묵히 엄마가 갔던 길을 쫓아서 간다. >

79년 그 시절, 아버지의 퇴직과 손아랫동생의 학비 내는 계절이 겹쳐 대학을 포기했던 아가씨, 취업과 대학 입학, 또는 중매로 한 두 번 만난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길로 나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꿈꿔왔던 대학을 포기하고, 자신 안에 별이 하나 둘 꺼지는 느낌을 받은 아가씨, 막막한 미래에 언젠가 나도 시집을 가야만 하겠지, 엄마의 일생 그 희생으로 점철된 일생을 오롯이 쫓아가야만 하는 줄로 알던 21살의 희옥이 나의 눈 앞에 그려졌다.

사실 희옥의 일기장을 발견하기 전, 나는 오늘 유언장을 썼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담담히 나의 미래가 어두워보여서 삶을 돌아보며 써보았다. 더 나은 희망을 바라면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엄마의 젊은 시절 일기장을 보니 엄마의 희생 아래 오롯이 큰 내가 부끄러웠고 나의 고민이 참 사소하게 느껴졌다. 삶의 고민이란 반복되는구나, 세대를 거쳐서,, 엄마세대에서 내 세대로, 지금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고민들은 언젠가 빛바랜 추억이 되고 , 나는 또다시 그 나이에 걸맞은 또 다른 고민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내 삶을 좀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유언장을 쓰고 엄마의 일기장을 읽는 것은 내게 뜻하지 않은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오늘 밤이 가고 나면 더 많이 웃고 다녀야지. 그리고 이제 63세가 되신 엄마를 안아주어야겠다. 더욱 사랑해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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