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옥 이야기 시리즈
우리 아빠는 엄마의 세 번째 남자 친구다.
엄마의 남자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자는 당연히 20대에 시집을 가야만 하는 시대에 태어난 엄마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
23살에 만난 희옥의 첫 남자 친구는 동네 아는 오라버니의 친구였다. 친구네 집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본 희옥에게 반해 케이크를 사들고 와서 넙죽 외할머니께 절하며 따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사람이었다.
눈웃음이 예뻤고,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착하긴 했지만 내세울 만한 직업이 있는 게 아니었던 그 사람은 한창 과외교사로 한 달에 대학교수만큼의 월급을 받던 희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는지 1년쯤 교제했을 때 외할머니의 ‘헤어져라’ 소리에 헤어졌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만나보라고 해서 만나고 헤어지라고 해서 헤어지다니...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 아직도 기억나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가자고 했다는 것, 가는 길에 양과점에 들려 케이크를 사서 내 손에 들려줬다는 것, 그러고 나서 자기 집에 가자고 해서 온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 데려갔다는 것. 상다리가 부러져라 식사를 차려놓고 3남 2녀인 그의 형제들과 어머니 아버지까지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 그 집 식구들이 다 착했어. 그 자리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누나들이 있었는데 동생이 여자 친구 소개해준다는 소리에 시댁에서 헐레벌떡 왔다면서 웃었었지. ‘네가 평생 원망할까 봐 급하게 왔지 뭐야’ 하면서.
그렇게 가족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여자 친구였을 희옥과 헤어지니 마음이 아팠을 것 같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25살에 6개월 정도 만났다고 했다.
- 역시 친한 오라버니가 소개해준 사람인데, 경제적으로는 조금 부유했어. 그 당시 경리 월급에 해당하는 3만 원이 조금 넘는 가죽 가방을 사줬었지. 또 서울에서 데이트할 때 처음으로 피자를 먹어봤어. 호텔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피자였거든.
근데 왜 헤어지게 됐냐는 내 물음에 희옥은 살짝 웃는다. 조금 씁쓸한 웃음이다.
- 내가 별로 안 좋아했거든. 게다가 나이 차이가 좀 있는데 건강이 안 좋았어. 신장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악화돼서 입원했어. 입원했으니 찾아가긴 했는데, 여태까지 내가 자길 예의 있게 대하긴 하지만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걸 느꼈는지, 어느 정도 포기했더라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됐지.
역시 가슴 아픈 사연이다.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결혼 후 나를 낳고 신장병 투병생활을 29년째 하고 있는 희옥이기에.
- 27살이 됐을 때, 또다시 선이 들어왔지. 위의 언니는 이미 시집가고, 손 아랫동 생은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많이 귀찮게 했었고, 이미 교제하고 있었을 때였어. 셋째가 슬슬 결혼 얘기가 오가니 외할머니 마음이 조급해진 거야. 둘째인 나 먼저, 무조건 순서대로 보내야지 안 그럼 혼삿길 막힌다고 생각하신 거지. 여기저기 소개가 들어오는 대로 다 만나보라는 거야 엄마가... 그래서 오죽하면 네 아빠를 만난 날, 다른 사람도 동시에 소개받아서 오전, 오후에 나눠서 다 만났었어.
- 아하하 재밌네. 근데 왜 아빠를 선택했어?
말투가 별로여서. 너무 으스대는 것 같아서 그 사람은 차고, 네 아빠를 만나서 10개월 정도 교제했지. 네 아빠는 차라리 과묵했거든.
아빠는 책 전집을 파는 일, 그러니까 세일즈맨이었다고 한다. 친구들과 이 일 저 일 전전할 뿐 제대로 모아놓은 돈도 없었지만, 외할머니의 ‘순서대로 시집보내기’ 프로젝트와, 그 어떤 남자에게도 설렘을 느끼진 않았지만 나이가 차서, 또 부모에게 순종하려고 한 엄마의 타이밍에 맞아 희옥과 결혼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왜 엄마를 먼저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동생은 시집갔는데 언니가 안 가고 있으면 ‘좀 문제 있는 처녀인가’하는 인식이 있는 시대였나 보다.
조금 씁쓸하다. 입맛이 까끌하다. 나는 엄마가 시집간 나이를 지났다. 이제 나는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 살이고, 내년에 서른이다. 서른이라는 성숙해 보이는 나이가 미성숙한 내게 올 줄 몰랐다.
결혼은 선택의 문제이지 의무가 아니라고, 이십 대 후반이 되도록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 부모님 덕에 나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며 남자 친구가 없다는 초조함도 느끼지 않는다.
똑똑한 희옥, 하고 싶은 게 많았던 희옥,
이제 결혼을 하면서 그녀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한다. 이제 난 지아비를 섬기는 입장이지 무언가를 개척해나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인생 항로의 선장이 아닌 선원으로서의 역할을 인식하며 그녀는 27살 결혼식 전날 밤 내면의 무엇인가를 바꾸었다. 그래서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계속 헌신했다. 과묵해 보였지만, 한 번 틀어지면 쉽게 욱하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양보하고,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남편을 위해 그녀 명의의 주공아파트도 팔고, 버섯농사도 지어보고, 길거리 트럭에서 인형도 팔았다.
어린 딸을 키우며 많은 고생을 했다.
나는 슬펐지만 엄마는 웃었다. 억지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 상황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웃음.
나는 행복해. 네가 있잖아.
나 낳지 말지 그랬어요. 낳았어도 이혼하지 그랬어.
참고 살길 잘했지. 네가 지금 잘하잖니..
희옥의 말에 나는 마음이 더 아프다. 그래, 사실 다 크고 보니 어렸을 때 무조건 아빠가 잘못한 거고 아빠가 제일 미웠던 마음이 많이 희석된다. 아빠의 자라온 성장배경이나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달랐을 뿐, 악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고 엄마가 한 번도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신 덕에 나는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 속에 녹아든 희옥의 눈물은 어디로 갔는가.
희옥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변곡점은 결혼이 다가 아니다. 그녀의 첫째 딸은 뇌성마비를 판정받고 겨우 7년을 살다 갔다.
기억나지 않는 나의 어린 언니 이야기. 희옥의 다음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