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성을 시도한 성당: 상리대성당
상리대성당은 노아용대성당과 함께 초기 고딕 양식의 정상인 라옹대성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검정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성당들은 고딕 양식의 핵심인 높은 공간과 공간에 담는 빛을 고민했다. 이 성당들에서는 고딕 양식을 처음 시도한 상스대성당보다 기둥은 가늘어지고, 벽은 얇아지고, 창은 더 커지고, 벽과 창 등의 기본 아치 구조는 더 뾰족해졌다. 그래서 이 성당들은 상스대성당보다 생드니 성당 후진을 개축하면서 쉬제르가 빛을 담는 공간을 강조한 고딕 양식의 정신을 이어받아 높은 공간을 시도했다. 상리대성당은 고딕 건축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성당은 아니어서 건너 뛰어도 좋지만, 성당을 감상하면 초기 고딕 양식의 발전 과정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상리스대성당 건축 역사는 ?
상리는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서 북쪽으로A4 고속도로 따라40 킬로 정도 떨어진, 인구 만 오천 정도되는 작은 타운이지만 파리 근교여서 외진 시골은 아니다. 여기는 이미 3 세기에 로마제국이 켈트족 침범을 막기 위해 성채를 지었다. 10 세기에는 프랑스 왕조의 시작인 카페왕조가 여기서 처음 도읍을 정하고 왕궁을 지었다. 12 세기에 루이 7세가 수도를 파리로 옮겨간 뒤에도 왕궁은 왕의 사냥터 별궁으로 사용돼 ‘왕의 도시’ 로 몇 세기동안 명성을 누렸다. 특히 12 세기에는 상리의 황금 시기였다. 이 시기에 왕궁과 마주 보이는 장소에 고딕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성당이다. 12 세기 유럽에서 처음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노트르담 (노트르담은 성모 마리아을 존칭하는 프랑스어로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운동이 일어나 수많은 고딕 성당들이 노르트담 성당으로 성모에게 봉헌됐는데, 상리대성당은 첫 노르트담 성당이었다. 또한, 고딕 양식의 핵심인 수직성 문제를 처음 진지하게 고민한 성당이다.
서쪽 파사드는 아치창들은 둥글고 불규칙하고, 벽은 두꺼워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다. 하지만, 남쪽 탑은 13세기에 성 루이 왕의 후원으로 레뇨낭 양식으로 지은 날렵하게 생긴 탑이다 (사진 3). 탑 높이가 78 미터로 아주 높이 솟아있어 A4 고속도로에서 상리 방향으로 들어서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서쪽 파사드 의 세 정문은 큰 특징은 없지만, 가운데 정문은 뛰어나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 가운데 정문의 주제는 성모 마리아가 소천해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영광의 왕관을 받는 영광의 성모 대관식이다(Coronation of the Virgin). 이 주제는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애가 3:22)’에서 가져왔다. 상인방에는 천사들이 성모 마리아를 하늘로 모셔가는 장면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사들이 운명한 성모 마리아를 수의 입으며 분향 한 뒤, 성모 어깨와 다리를 들어올리고 있다. 어떤 천사들은 나래를 푸드득 펼쳐 성모 마리아 얼굴을 앞 다투어 바라보며, 어떤 천사들은 성모의 육신을 하늘 나라로 올려가려고 이미 공중에 떠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조각 하나하나가 마치 지금 막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그린 듯 생동감이 느껴진다 (왼쪽 일부분은 프랑스대혁명때 파괴됐다). 그 위 팀파눔에는 하늘나라에서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로부터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권위있으면서도 인자한 할아버지 같고, 성모 마리아는 약간 새침한 표정이다. 조각은 아직 고딕 양식의 초기 단계로 세련되진 않았지만, 여기서 처음 엄격하게 심판하는 그리스도 보다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잇는 중계자인 따뜻한 성모의 사랑을 그렸다.
성당의 중심 입구인 남쪽 파사드
남쪽 파사드가 성당 중심 입구인 남쪽 외관은 좀 복잡하다. 길지 않은 남쪽 외관 서쪽 모서리에 레뇨냥 양식의 높은 첨탑, 남쪽 외관 가운데 풀라부아앙 양식으로 지은 화려한 남쪽 익부 파사드가 자리잡고, 파사드 오른쪽에는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팔각 예배소와 벨리(Bailli) 예배소가 있고, 예배소 뒤에는 둥근 탑 등, 여러 구조들이 남쪽 외관을 차지하고 있다. 12 세기에 지은 성당 원래 벽은 이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남쪽 파사드 앞에는 타운 사람들이 모여 축제나 여러 행사를 할 수 있는 광장이 있어 여기를 성당의 중심 입구로 사용하고있다.
높고 밝아진 공간
성당은 상스대성당 다음에 지은 성당인데 안으로 들어서면 첫 눈에 상스대성당보다 훨씬 더 높다는 느낌이 든다. 성당의 천장 높이 (23.5 미터)는 상스대성당 (24.1 미터) 보다 낮지만, 성당 중랑의 폭(8.4 미터)은 상스 성당의 폭 (15. 14 미터)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로 좁다. 그래서 성당 천장 높이가 상스대성당 보다 낮아도 훨씬 더 높게 느껴진다. 높이에 비해 폭을 좁게 지어 수직성을 강조했다.
성당 벽 구조를 살펴보자. 벽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상스대성당 3층 구조지만 아케이드층와 채광창 사이 두껍게 막힌 트리포리움층 대신 큰 갤러리층을 지었다. 이 갤러리층은 트리포리움층의 물성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성당의 중심 공간을 갤러리의 공간으로 둘렀다. 그래서, 신랑 양쪽 측랑창, 갤러리창, 채광창의 각 층마다 빛이 들어와 성당 내부 공간이 밝다. 갤러리 위 채광창 높이는 아케이드층 높이보다 더 길어 균형감은 좀 떨어진다. 16 세기 대화재로 파괴된 성당을 복원하면서 채광창을 7 미터나 더 올려 천장 높이(23.5 미터)가 훌쩍 높아졌다.
성당의 기본 구조는 (신랑 양쪽 한개씩 측랑이 있는) 3 랑식 구조와 6 분 천장 구조였다. 하지만, 13세기에 익부를 짓고, 16세기에는 큰 화재로 천측창과 천장을 다시 지으면서 교차랑을 확장해 익부 지으면서 신랑의 양쪽 복도의 여러 구간을 밖으로 넓혀 3 랑식에서 5 랑식 으로 확장했다. 그래서, 신랑 시작 부분은 3 랑식으로 시작해 성당 가운데 부분은 5 랑식, 다시 내진 끝 부분이 다시 3 랑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됐다. 대체로 익부가 있는 고딕 성당들은 십자가 모양의 성당 평면 구조지만, 상리스성당은 익부 근처를 5 랑으로 확장하는 바람에 성당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나온 타원형 구조가 됐다.
생드니 수도원 성당의 후진에서 수도원장 쉬제르가 실험한 ‘빛을 담는’ 의 고딕 정신이 여기서 처음 시도됐다. 그래서, 상리대성당을 ‘제 2의 초기 고딕’의 길을 열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가서 감상해 보면 같은 초기 고딕 양식을 처음 시도 한 상스대성당과 사뭇 다른 성당 성당 인 걸 느낄 수 있다. 상리대성당은 보다 성숙한 고딕 양식으로 나가는 검정다리가 됐다.
성당과의 첫 만남
십수 년 전, 고딕 성당 첫 순례 길에서 처음 만난 상리대성당의 기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밤새 대서양을 건너 이른 아침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으로 마치고 렌트 카를 찾아 A1 북쪽으로 40 분 정도 운전해 상리로 가는 출구를 나와 상리 근처에 다다르니 저 멀리 성당 높은 남쪽 탑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저기야. 밤새 비행기 타고 온 피곤이 풀리고, 가슴이 뛴다. 일방통행 좁은 골목길을 지나 성당을 찾아갔다. 마침, 가톨릭 성축일이었던가. 성당 앞 광장에는 차려 입은 남녀노소로 가득 붐볐다. 축제 분위기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이 성찬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녀들은 발레복 같은 흰 옷을 입고 머리에 흰 꽃으로 엮은 띠를 두르고, 소년들은 넥타이 정장을 하고 부모 손잡고 성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소리치며 뛰어다녀 소란스러웠지만 시끄럽지는 않았다. 성찬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성당 저 뒤쪽 후진에서 누군가 성가곡 트럼팻을 연주하고 있었다. 너무 맑아 슬픈 여운이 감도는 트럼펫 소리는 사람들의 소란한 소음에 젖지 않고 고고하게 솟아 아침 햇살 가득한 저 위 천장 아래 공간에 고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음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소음은 안개처럼 낮게 퍼질 뿐 트럼펫 소리가 고이는 저 높은 공간에는 닿지 못했다. 사람들의 소음이 소란할수록 저 위 트럼펫 소리가 고여 있는 밝은 공기는 소음을 내려 감싸 성당 안 전체 분위기는 오히려 조용했다. 신의 은총일까? 이 맑은 아침, 밤새 대서양 건너 다음날 아침 피곤하게 도착해 불현듯 만난 이 광경은 생소했지만 낯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