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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성 Dec 08. 2022

고딕 성당을, 순례하다-3:
생드니 수도원 대성당  

                 고딕의 문을 열다: 생드니 수도원 대성당


    생드니 수도원 대성당(Basilica Cathedral of Saint Denis)은 파리 중심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흐르는 센강 기슭에 위치한 소도시 생드니 시내에 있다. 생드니는 파리의 위성도시에 지나지 않지만, 중세에는 파리가 ‘생드니 근처에 있는 도시’로 불릴 만큼 프랑스 북부의 주요 도시였다. 당시 파리도 생드니 대교구에 속해 있었다. 19 세기까지도 생드니는 섬유 산업 도시로 번창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랍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사는, 파리로 출퇴근하는 서민들의 외곽 도시로 자리 잡았다. 파리 중심 시내서 지하철 14번 선을 타고 40분쯤 가면 생드니역에 도착한다. 역에서 5 분 정도 가면 5 일장이 서는 큰 광장이 나온다. 광장 끝 모서리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단정한 모습의 성당을 만난다. 성당은 파리 교외에 있어 생드니에 있어 파리 시내에서는 한걸음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 명소는 아니다. 하지만 생드니 수도원 대성당은 고딕 건축 양식의 문을 연 성당이어서 고딕 건축의 탄생을 감상하려면 꼭 순례해야 하는 중요한 성당이다. 때로는 주요 고딕 성당들을 감상하기 위해 온종일 운전해야 하는 노고에 비하면 손쉽게 감상할 수 있다. 파리에서 한나절이면 성당을 여유 있게 감상하고 돌아올 수 있다. 


    생드니 수도원 대성당은 아주 유서 깊은 고딕 성당이다. 성 디오니시오 신부가 3 세기 처음 파리 지역 주교로 임명받아 선교 활동 중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순교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참수당한 머리를 가슴에 안고 언덕을 내려와 6 킬로 미터나 떨어진 신이 점지한 장소, 지금의 생드니에서 숨을 거두어 여기에 묻혔다한다. 


파리 대성당 입구에 있는 파리 (프랑스 왕국) 수호성인, 성 디오니시오 성인 조각상 


    5 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 세는 유럽 왕 중에서 처음 개종해 세례를 받고 성 디오니시오를 프랑스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그가 묻힌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그 후 성당은 프랑스 왕국의 성당으로 공인되었고 7세기 프랑크 왕국부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천년 넘는 긴 시간 동안 거의 모든 프랑스 왕과 왕비들은 여기 묻혔다. 일테면 성당은 프랑스왕국의 종묘였던 셈이다. 프랑스대혁명으로 200 개가 넘는 석관들이 유실되고 지금은 석관들만 남아있지만 지금도 80여 개 석관과 영묘들이 성당 구석구석뿐 아니라 지하 예배소에도 비좁게 전시되어 있다. 


성당에 보관하고 있는 프랑스 왕과, 왕비 석관과 영묘들


     생드니 수도원 대성당은 고딕 건축 양식의 문을 연 성당이다. 성당 내진과 내진을 둘러싸고 있는 후진을 개축해 어둠에 잠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서 처음 고딕의 빛을 밝혔고, 다시 100여 년 뒤 성당 대부분을 레뇨낭 양식으로 재건축해 성당은 밝고 가벼운 공간을 담는 고딕 성당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생드니 수도원 원장 쉬제르는 300 년이나 나이 든 낡은 성당을 재건축할 장대한 계획을 세우고 우선 첫 단계로 서쪽 파사드, 현관, 내진과 후진을 개축했다. 특히, 후진을 지을 때 처음 고딕 양식을 시도했다. 내진을 둘러싼 후진의 이중 회랑을 확장했다. 그리고, 바깥 회랑을 확장해 제실을 지어 빛을 담는 공간을 짓고, 제실의 무거운 벽 대신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둘러 빛이 막힘없이 들어오게 해 빛을 막힘없이 들어오는 밝고 넓은 후진을 지었다. 여기서 처음 쉬제르는 빛을 담는 공간을 강조하는 고딕 양식의 문을 열었다. 


성당 2중 회랑으로 구성된 후진, 바깥 회랑은 확장해 제실을 지었다. 


후진 가운데 제실, 스테인드글라스가 뛰어나다.  여기서 스테인드글라스가 고딕 양식의  필요 불가결한  구조로 처음 등장. 


    안타깝게도 그는 성당 나머지 부분을 개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성당 후진을 개축 한 뒤 100여 년 후, 성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랑과 내진을 초기와 높은 고딕 양식을 지나 레뇨낭 양식으로 다시 지었다. 그래서 성당을 레뇨낭 양식의 고딕 건축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성당은 후진을 개축하면서 고딕의 문을 열었고, 성당 본진을 개축하면서 레뇨낭 양식을 거의 처음 시도했다. 


수도원장, 쉬제르가 개축 한 서쪽 파사드(맨 오른쪽), 현관, 내진, 후진(맨 왼쪽 둥근 부분), 나머지 부분은 나중에 레뇨낭 양식으로 개축했다. 

    '왕의 파사드’로 불리는 성당 서쪽 파사드는 성당의 중심 입구라서 그 성당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우람한 4 개 기둥 사이로 3 개 부분으로 나눠져 있고, 다시 위아래로 3 부분을 나눠 있으며 3 층 가운데 장미 창이 있다. 맨 아래 입구층 가운데는 팀파눔에는 최후의 심판, 양쪽 문에는 성 디오니시오 성인이 순교하는 장면을 조각으로 새겼다. 원래는 남쪽 북쪽 모두 탑이 있었으나 북쪽 탑은 19 세기 때 벼락을 맞아 허물어졌다. 아주 세련된 구조는 아니지만 좌우, 위아래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전체가 하나로 균형 잡힌 구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기하학의 균형감 있는 서쪽 파사드를 여기서 처음 선보였다. 이후, 기하학의 균형을 강조하는 고딕 성당의 파사드 기본 구조로 발전했다. 


성당 서쪽 파사드, 기하학적 균형감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구조를 완성하고 있다. 


    성당에 들어서면 신랑에서 저 후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레뇨낭 양식으로 지은 성당 신랑과 내진은 가볍고 밝다. 원래 쉬제르는 내진과 후진을 함께 재건축했지만, 100여 년 후, 쉬제르가 지은 내진을 허물고 레뇨낭 양식으로 지어, 지금은 후진만 쉬제르가 원래 지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는 성당은 성당 대부분 차지하는 신랑과 내진을 레뇨낭 양식으로 지어 레뇨낭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성당 신랑 입구에서 내진을 바라보는 전경


    성당 벽 구조는 이전의 높은 고딕 양식의 성당에 비해 한결 밝고 가벼워졌다. 원래 높은 고딕 양식에선 벽으로 막힌 트리포리움층 아래 아케이드층, 위에 채광창의 3층 구조인데 레뇨낭 양식으로 지은 여기선 트리포리움층이 채광창에 흡수돼 큰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지어 큰 채광창과 높은 아케이드층의 2 층 구조로 나눠졌다. 그래서 한층 길어진 윗 층은 벽 대신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병풍처럼 둘러 내부로 빛이 들어와 높은 고딕 양식에서 남아있는 어두운 분위기는 밝은 빛으로 담는 공간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아케이드층도 높아져 신랑을 둘러싸는 측랑 공간이 확대되면서 신랑의 중심 공간과 막힘없이 합쳐 성당 내부는 밝아지고, 가벼워지고, 공간이 확대됐다. 성당은 전형적인 레뇨낭 건축 양식의 얼굴이다. 

    수직성을 강조하는 기둥도 크게 변했다. 5 개 가는 다발 기둥들이 바닥에서 성당 맨 위 채광창 허리까지 솟아 제일 바깥 양쪽 2 개 기둥은 채광 창틀로, 바깥 2 개 기둥은 궁륭의 교차 늑재가 되고, 가운데 기둥은 궁륭의 횡단 늑재가 되어 반대쪽에서 똑같이 올라오는 늑재들과 만나 늑재 교차 궁륭을 만든다. 이렇게 바닥에서 수직으로 솟아 휘어져 천장을 만드는 뾰족아치 구조가 성당의 골격을 이룬다. 아치 뾰족아치 곡선 하나하나 수려하다. 들어가면서 보면 뾰족아치 틀이 반복되는 리듬이 뛰어나다.


레뇨낭 건축양식의 가볍고 밝은 벽 구조, 트리포리움층에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해 채광창에 흡수되어, 3  층 벽 구조에서 채광창과 아케이드층의 2층 구조로 단순화됐다.


         성당 내진을 지나 내진 끝을 둥글게 둘러싼 후진을 감상하자. 후진은 성당의 작은 부분이지만 바로 여기가 쉬제르가 처음 고딕 양식을 시도한 장소다. 고딕 건축 양식의 탄생지라 알려진 아주 중요한 곳이다. 후진은 2 개 회랑으로 구성됐는데, 두 회랑 사이 기둥은 가늘고 기둥머리에서 아치 늑재들이 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아치 천장으로 만든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고딕 양식의 특징인 늑재 아치 천장이 만들어졌다. 안팎 회랑들은 넓고 막히지 않아 마치 내진을 반원 도넛 같이 둥글게 감싸는 공간을 만든다. 바깥 회랑은 확장해 제실을 짓고, 제실에는 벽 대신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둘렀다. 그래서 안팎 회랑과 제실이 어우러져 막힘 없이 넓게 열린 공간에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이 들어와 하늘의 빛을 담는 공간을 완성했다. 중세에는 이 땅의 빛은 하늘나라에서 흘러내려오는 천상의 빛으로 믿었다. 빛이 없으면 세상은 끝없는 어둠이었다.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 도 있지만 이 후진을 봉헌할 때 유럽 각 지역마다 초청받은 귀빈들이 어두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본진을 지나 후진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밝은 공간을 만나 큰 감동의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여기서 쉬제르는 늑재 교차 궁륭, 뾰족아치 구조와 스테인드글라스 기법들을 하나로 묶어 고딕 양식의 정신인 ‘빛을 담는 공간’ 창조했다. 이후, 고딕 양식은 끊임없이 변화 발전했지만, 쉬제르의 고딕 건축의 정신은 500 년 고딕 건축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이었다. 


성당 후진의 이중 회랑, 바깥 회랑 밖으로 확장해 제실을 지어 넣었다. 


성당 후진의 가운데 제실


    성가대석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면 성당 지하 예배소가 나온다. 여기는 수도원장 쉬제르가 내진과 후진을 재건축하기 전에 크게 확장한 부분이다. 그는 지상의 구조를 지탱할 수 있는 우람한 기둥과 늑재 교차 아치 천장을 세우고 외벽에는 후진 예배실처럼 스테인드글라스창를 올렸다. 여기서 쉬제르는 성가대석을 짓기 전에 그의 로망이었던 고딕 건축 양식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 

    지하 예배소에도 왕과 왕비의 석관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특히, 성 디오니시오 성인과 그와 함께 순교한 성인 두 분의 석관들도 누워있다. 1930년 무렵 대대적인 유적 발굴 사업을 진행해 지하실에서 세분 성인들의 석관을 발굴해 천육백 년 긴 시간 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성인 세 명의 묘지를 확인했다. 또한 무덤들을 감싸고도는 긴 회랑을 발견해 여기가 오랫동안 순례 성지였다는 기록도 고증했다. 


지하 예배소에서 발굴된 석관들

    수도원장 쉬제르는 생 드니 수도원 성당 후진을 재건축하면서 어둠에 묻힌 집의 문을 열어 하늘의 빛을 담았다. 그가 시도한 새로운 건축 양식은 500여 년 동안 이어온 고딕 건축 양식으로 발전했다. 고딕 건축 양식은 빛과 공간 관계를 고민해 현대 건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축 양식에 공간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어찌 보면 그가 처음 시도한 건축 양식은 작은 것일 수 도 있지만, 그가 이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다양한 고딕 건축 양식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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