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육군훈련소에 입소했다.
한 달 전, 남편과 나는 입소 당일(4월 28일) 부산에서 출발해서 훈련소로 바로 갈 것인지, 아니면 전날 논산에서 가까운 지역의 숙소로 가서 하룻밤 자고 훈련소로 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남편의 상안검 상태가 불안정하다 보니 운전 컨디션을 확신할 수 없어 당일에 출발할 경우 나 혼자 오롯이 하루 내내 7시간 내지 8시간의 오가는 운전을 다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남편의 입장에서 많은 부담으로 작용했다보다. 해서 전주나 대전에 숙소를 잡아서 입소 전날 가서 하룻밤 자고 당일에 여유 있게 훈련소로 가자는 게 남편의 주된 의도였다. 사실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입장이었다. 아들의 의견은 망설임 없이 전날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대전의 이름난 제과점에도 가보자고 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 가족 세 사람은 군 입대를 위한 내키지 않는 숙박이지만 다른 한 켠으로는 '그래 이왕 숙소까지 잡아서 타 지역으로 가는 거라면 즐기는 것도 괜찮지.' 하는 나름의 위로를 하고 있었다. 숙소는 대전의 호텔로 잡았다.
4월 27일 일요일 오전 11시.
우리 가족은 늦은 아침, 이른 점심으로 김밥을 먹었다. 세 시간가량 운전을 해야 했기에 배불리 먹는 것이 부담되었다. 가볍게, 더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밥을 먹고 주방 정리를 하고 나니 낮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 되었다. 아들에게 샤워나 양치질을 재촉하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냥 기다렸다. 며칠 사이에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아들로부터 스무 번도 넘게 들었던 터라 어떤 행위를 재촉하는 야박한 엄마가 되어선 안 되었다.
아들은 샤워하고 세탁해 놓은 옷을 입고 책상에 앉아 밴드 공연 영상을 보고 있었다.
"짐 챙겨갈 가방 가지고 이쪽 방으로 와 볼래?"
먼저 자녀를 입대시킨 선배들의 조언, 아들 또한 먼저 입대한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조언을 기반으로 우리가 준비한 소지품을 아들에게 챙겨보라고 했다. 여러 물품 중에서 내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발바닥 사마귀와 관련한 처방약, 소독약, 깔창 등이었다. 아들은 주섬주섬 챙기더니 간간히 "후~"하는 한숨을 쉬었다.
4월 27일 일요일 오후 3시.
대전으로 출발했다. 남편은 운전을 할 수 있겠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조수석에 앉고, 아들은 뒷좌석에 짐가방을 두고 앉았다. 톨게이트를 지나 얼마 안 가서 아들을 보니 잠들어 있었다.
아마 11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아들은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남자는 스무 살 넘어가면 군대 가야 한대. 아~ 가기 싫다."
"그럼, 엄마가 군대 갈까? 엄마는 우리 아들 군대 보내기 싫은데?"
"진짜? 엄마가 가도 되는 거야? 아~ 그것도 싫다."
그때는 내용은 안중에 없고 푸념하는 아들의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그저 예뻐 죽겠다는 마음으로만 아들을 바라봤다.
잠든 아들의 모습을 수시로 돌아봤다. 건강하게 잘 커준 고마움, '국방의 의무'라는 과업을 받아들여야 하는 짠한 마음, 또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온다는 확신의 마음이 뒤섞여서 내 마음도 심란했다.
아이보리색 이팝나무가 끝없이 펼쳐지면서 아들을 응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 7시가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대전의 이름난 제과점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호텔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와 아들과 부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만나서 아침 식사하자는 시간 약속만 한 채로.
4월 28일 오전 7시.
나와 남편은 7시를 조금 넘겨 눈을 떴다. 우리는 씻고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다가 문을 연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씩 마셨다.
아들은 약속한 시각에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전화도 안 받았다.
나는 남편에게 좀 더 자게 놔두자고, 아침 건너뛰는 게 대수는 아니라고 하며 10시 30분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리고는 10시 30분을 넘겨 아들을 깨웠다. 아무것도 못 먹겠다고 하면서 속을 비우고 가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긴장했는지 아침에 화장실을 두 번 다녀오면서 속을 탈탈 비워냈다. 배부른 상태보다 살짝 허기진 상태가 더 편하다. 삼시 세끼 꼭 챙겨 먹어야 하는 남편도 배고프다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속을 비운 상태로 논산으로 향했다. 40분가량 아무 말 없이.
4월 28일 오후 2시
아들이 육군훈련소에 입소했다.
내 눈에는 다 아기같이 여리여리해 보이는 이 아이들이 무슨 총을 든단 말인가.
애 앞에서 울지 마라는 선배들의 말이 생각나 꾹꾹 눌러 가며 내 마음을 추슬렀다.
연병장으로 내려오라는 안내에 아들은 남편과 나를 번갈아 가며 안아주고 가방을 울러 매고 내려갔다.
나는 입가의 욱신거리는 약한 통증을 잘 이겨냈는데 아들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소리 없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언젠가는 거쳐야 하지만 막상 그 언젠가가 되고 보니 "왜?" 하는 반심이 생긴다.
그저 "안전하게, 무사하게 군생활 마무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이성적인 사람들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끊임없이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가 닿을 수 있게 나와 남편은 반듯하게 생활하며 아들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