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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텅 빈 방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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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은 Jul 18. 2022

작고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상

- 베를린, 폴란드 일기 14

첫째와 자주 통화했다. 우리가 오전 일정을 시작할 즈음이면, 첫째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뒤에 퇴근한다고 말했다.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첫째에게 친구를 데려와 집에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고, 친구네 집에 가서 지내도 된다고 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는 친구 집에 가거나 친구를 자주 데려왔는데, 정작 우리가 떠난 뒤에는 혼자 집에 있었다. 주말에는 밀린 잠을 보충하고, 주중에는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빴다.

신입으로 일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더 마음 쓸 일이 많았을 것이다. 매일 퇴근하고 돌아와 우리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며 지냈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힘들 것 같았다. 

 “뭐 필요한 거 없어?”

“하리보!”

“야, 그래도 부모가 외국 여행을 왔는데 진짜 그거 말고 없어?”

“잘 모르겠어. 뭐가 필요하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학생들이거나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캐주얼을 즐겨 입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비싼 옷이나 좋은 악세사리를 쓸 일이 별로 없다. 별로 관심도 없고. 나야 일 때문에 그렇다쳐도 첫째도 나랑 비슷하다.

“베를린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야. 하리보도 살게. 또 다른 건, 우리가 알아서 살게.”

“응. 엄마랑 아빠, 사랑해. 오늘 잘 돌아다녀. 맛있는 것도 사먹어. 알았지?”

“알았어.”     


우리는 하루를 작은 가게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베를린에는 문구류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 여러 곳에 있다. 그 중에 특색 있는 몇 군데는 여행 책자에도 소개되어 있어서 가보고 싶었다. 

    


‘두스만 문화 백화점’은 건물이 통째로 책과 문구류, 앨범으로 채워져 있다. 책갈피, 펜, 잉크, 만년필, 드로잉 펜, 편지지, 편지봉투, 랩핑 북(포장지를 책 형태로 엮은 것)을 구경했다. 성소수자를 위한 레인보우 축제가 열리는 6월을 맞아, 서점 한 켠에 ‘레인보우’ 코너가 따로 마련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New Adult’ 코너도 눈에 넣었다. 한국에서는 ‘청소년 소설’이라고 불렸으나, 그 의미가 남성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대체할 단어를 아직 찾지 못했으며, ‘Young Adult’라고 쓰는 출판사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청소년 소설’이라고 쓴다. 요즘은 ‘소설’이라고 표기하는 곳도 많다. 독일에서는 이 개념을 ‘New Adult’라고 부르는구나 싶었다.     

 

다시 버스와 지하철,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AMODO’ 앞에서 잠깐 줌을 켰다. 그날, 한국에서는 ‘팽목바람길’ 화상 회의가 열릴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 환한 거리를 비추었다.

“안녕! 지금 대낮이에요. 베를린 시내고, 내일 폴란드로 떠나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회의 잘 하세요.”

회의가 아직 시작하기 전에 줌에 미리 들어와 있던 두 사람이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와이파이 환경이 아닌 곳에서 데이터를 오래 쓰면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서 얼굴만 비췄다.     


누군가 독일이 문구류에 진심인 나라라고 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 가게마다 특색 있는 문구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R.S.V.P. Papier in Mitte’은 문이 닫혀 있었다. 문 여는 시간에 맞추려면 근처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카드를 받지 않는 가게에서 쌀국수를 사 먹었다. 참새 한 마리가 테이블 위로 올라와 다가왔다. 손으로 휘저어도 가지 않고, 행여 떨어뜨리는 게 있을까 하며 알짱거렸다.


쌀국수를 먹고 왔는데, 아직 가게 문은 닫혀 있었다. 우리가 가게 앞 긴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백팩을 멘 젊은이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그 앞을 서성였다. 지도를 몇 번씩 들여다보는 모양새가 이 가게를 찾아온 사람 같았다. 나는 반려 쪽으로 당겨 앉으면서 내 옆자리를 손으로 쳤다.

젊은이가 웃으면서 내 옆으로 앉았다.

그리고 휘이후 휘이후 새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젊은이가 “Oh, My Gosh!”하고 외쳤다. 건물 지붕에 앉은 새가 쇼핑백 바깥을 강타하는 새똥을 발사했기 때문이다. 새는 똥과 오줌을 따로 누지 않고, 둘을 섞어서 배설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처럼 묽고, 물기가 마르면 단단해진다.

그런데 이 봉변을 당한 젊은이가 깔깔 웃었다.

“I’m Lucky!”

새똥이 떨어졌는데도 자신이 아니라 쇼핑백만 맞았으니, 자신은 무지하게 운이 좋다며 활짝 웃었다. 환한 웃음은 주변까지 밝힌다. 나도 당신은 정말 운이 좋다고 맞장구쳤다. 그래도 가방을 뒤져 찾아낸 물티슈를 건넸다. 젊은이는 내게 가방 안에 별 게 다 있다고 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배낭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쇼핑백에서 물건을 꺼내 배낭으로 옮겨 담았다. 쇼핑백에서 속옷들이 줄줄이 나왔다. 아, 이 친구는 아직 빨래를 못했구나. 베를린에서 빨래방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서, 우리도 겉옷을 돌려가며 입는 중이었다. 속옷과 양말은 저녁마다 빨아서 널어놓았고.     


‘Do You Read Me?’라는 서점에서 여러 책을 둘러보다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을 한 권 샀다. 

‘루이반’에서 황동 연필깎이를 사고, 연필, 카드 몇 장을 샀다. 마스킹 테이프들이 눈에 띄었지만, 집에 있는 것들을 떠올리며 눈에만 넣었다. 


‘뵈스너(Boesner)’는 거대한 화방이었다. 건물 입구에도 그래피티가 가득해서 인상적인데, 안으로 들어서면 그림 도구들이 즐비하다. 홍대에 있는 호미화방 세 배쯤 되는 건물을 구경하면서, 만년필 잉크를 사고 드로잉 펜도 몇 개 샀다. 반려는 볼펜 심을 사고 싶어했는데, 찾을 수 없어서 포기했다.

나는 고체 물감 세트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요즘 그림을 띄엄띄엄 그리는 데다(가끔 그린다), 갖고 있는 물감을 더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미니멀리즘까지는 아니지만, 요즘은 물건을 사기 전에 집에 있는 물건들의 재고를 먼저 떠올린다. 

한 블록 옆에서는 바자회를 열었다 끝냈는지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우리는 콰르티어 205,206,207을 둘러보았고, 건물 지하에 쌓아올린 폐차된 구조물을 보았다. 생명을 다한 차량들이 납작하게 눌려서 한데 모여서 또 다른 예술품이 되었다.   

   


그리고 ‘노이에 바헤(Neue Wache)’에 들렀다. 황제 친위대였던 1연대를 위한 건물이 ‘국립 전몰자 추모관’이 되었다가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기원하는 기념관’으로, 통일 이후에는 ‘잔학 행위 및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위한 독일연방공화국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이 긴 이름 대신 ‘노이에 바헤’로 불린다. 이곳에 케테 콜비치가 만들었던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아들을 잃은 콜비츠가 만든 조각상을, 하랄트 하케가 네 배로 확대해서 제작했다.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는 서양화에서 자주 쓰이는 이미지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술을 안고 비통해 하는 주제를 ‘피에타’라고 하는데,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대표적이다.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피에타를 만들었다. 그러나 ‘노이에 바헤’에 있는 조각은 다른 피에타들과 달리 바깥에 노출된 상태다.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어깨와 등 위로 빛이 떨어진다. 그 위에 천장은 뻥 뚫려서 햇살뿐만 아니라 비와 눈도 고스란히 떨어진다. 잔학 행위 및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 그 희생자를 안은 어머니가 눈과 비를 맞으면서도 아들을 꼭 잡고 있다. 떠나간 생명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어머니는 알고 있다. 아무리 붙잡아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대로 그냥 놓을 수는 없다. 자식과 보낸 시간과 세월, 그 사랑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걸 부정하고 싶을 테니까.

이 조각상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또 다른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안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숙소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 타는 사람이 커다란 개를 데리고 탄다. 베를린에서는 개들이 목줄이나 가슴줄로 연결한 채 버스나 트램에 탄다. 다른 승객을 공격한다거나, 발로 옆 승객을 찬다거나 핥는 걸 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케이지에 넣어야 한다. 장애인 안내견을 제외하고.

그런 광경에 익숙했는데, 내 덩치만한 개들이 줄로만 묶인 채 버스에 올라탔다가 내리는 풍경은 낯설었다. 독일에서는 반려동물을 판매하는 펫 숍이 없다. 유기동물을 입양하거나 사육사에게서 새끼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약해야 하는데,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키우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기 동물들을 줄이는 정책을 쓴다고 한다.     

그리고 휠체어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베를린은 자전거 도로가 발달했는데, 여행자가 자전거 도로로 잘못 접어들면 자전거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면서 비키라고 한다. 이 자전거 도로는 사람이 걷는 보도보다 매끄럽다. 그 길로 휠체어가 다니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버스나 트램은 정류장에 멈출 때 사람이 타는 방향으로 슬쩍 기울었다가, 출발하기 전에 다시 제자리 높이로 돌아간다. 

장애인 이동이 쉽지 않아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여러 번 벌어졌던 서울을 떠올렸다. 첫째도 출근길에 그 시위를 경험했다. 

누군가는 장애인 이동권을 주장하는 장애인들에게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쌍욕을 한다. 혹은 그들 때문에 불편하다고, 왜 하필 출근 시간이냐고 투덜거린다.

내가 유아차를 끌기 전에는 보도가 이렇게 좁은지 몰랐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 층계와 버스 층계를 오르내리기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멀쩡하게 잘 놀던 아이는 꼭 내리기 직전에 깊은 잠에 빠지기 일쑤였고, 그러면 가방을 메고, 아이는 들쳐 업고, 유아차까지 질질 끌면서 내려야 했다. 더 최악인 것은 내가 내릴 준비를 미리 하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기사와 승객들이 있었다. 그때 비틀거리던 나를 잡아준 사람은 내 또래 여성이거나 학생들이었다. 

장애인들은 나보다 더 힘들다. 그들도 출근하고, 병원에 가고,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 빙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휠체어로 탈 수 있는 구역에서도 편히 자리 잡을 수 없다. 장애인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곳은, 유아차도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도 마찬가지고, 무거운 캐리어를 끄는 여행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만큼 장애인 이동권이 중요하다. 베를린의 보도는 서울보다 넓고, 자전거 도로는 충분했고, 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 듯했다. 



카카오톡을 확인하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둘째가 카톡을 보냈다.

‘이제 하루에 10분씩 핸드폰 쓸 수 있으니 카톡 남기셔도 돼요. 시차도 있으니 전화 못해도 괜찮아요. 전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 아부지한테도 전해주시고 여행 잘 즐기다 오세요. 사랑해요!’ 그러고는 평소에 잘 안 쓰던 이모티콘도 보냈다.

보낸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는 없었지만, 훈련소에 들어간지 한참만에 확인한 소식이었다. 나는 우리 둘이 찍은 사진을 보냈다.

‘우린 곧 폴란드로 넘어가. 소식 고마워, 사랑해.’     


폴란드로 이동하기 전에 짐을 다시 점검했다. 기차로 국경을 넘는데, 들고 다닐 짐은 가볍게 하되 이동할 때 필요한 물건들이 빠지지 않게 챙겨야 했다. 저녁으로 햇반을 데워 먹으면서 자물쇠와 스프링 고리들을 따로 뺐다. 열차 이동을 할 때 캐리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기둥에 잘 묶어야 한다. 유럽 여행에서 짐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혹시 모를 만약을 위해, 폴란드 일정을 잘, 웃으면서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건배!”

나는 베를린 맥주를, 반려는 무알콜 맥주를 마셨다. 무알콜 맥주는 시원한 냉장고에 있고, 알콜 맥주는 진열대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제는 미지근한 맥주도 마실만 했다.

“나는 베를린 좋았어.”

“나도.”

“며칠 동안 고생했어, 당신.”

“당신도.”

폴란드는 둘 다 처음 간다. 어떤 곳일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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