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전화기가 울린다. 슬쩍 가서 보니 어머니라고 뜬다.
짐작이 간다. 조금 있으면 추석이다. 아마 추석이 주제 일거라 생각한다.
남편이 전화를 받고 조금 뒤에 "알았어, 민정이랑 상의해 보고 연락 줄게요"
내 이름이 나왔다. 뭐지. 느낌이 좋지 않다.
왜, 무슨 일 있으셔?
"아니, 예진(조카다) 이가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한다고, 이번 명절은 우리 집에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어머니도 온 지 오래됐다고 오고 싶어 하시기도 하고..."
...
"그래서 내가 유랑 상의해 본다고 했지"
남편은 마치 나를 무척이나 생각한 듯이 말을 내뱉는다.
(나를 생각했으면, 말이 나오자마자 아이들도 할머니 집에 가고 싶어 한다든지, 나도 엄마 집에 가고 싶다 던 지 다른 핑계를 말해야 하였던 거 아닌가...)
남자들은 여자들과 다르다. 말이 나오면 바로 딱 대처하는 말솜씨가 부족하다. 그래서 다시 말해야 하는 곤경에 처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생각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집 한번 대청소하고,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장 봐서 초대를 할까?
두 번째 생각은 그냥 어머님 집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조금 언짢아하시겠지만 눈 딱 감고 넘어갈까?
사실, 명절이 아니더라도 누가 갑자기 집에 방문한다고 하면 신경이 곤두선다. 항상 우리 집은 깔끔함이라고는 거리가 멀 기 때문이다. 네 식구의 옷이 거실에 방에 널 부러져 있고, 화장실은 화장실 대로 부엌은 부엌대로 질서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 온다고 하면 우선은 안 왔으면 좋겠고, 꼭 방문을 해야 되는 사람이 와야 하는 거라면, 나는 몇 시간 전부터 청소를 시작하게 되고, 나의 몸은 피곤함을 극치를 달리며, 마음 상태도 무척이나 예민해진다.
왜 그럴까? 나의 하루를 들어가 보자.
하루 14시간을 투자한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의 몸의 세포는 하나하나 모두 힘이 없다. 어찌 쥐어짜듯 힘을 내서 아이들과 남편 또 내가 먹을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 내일 입을 옷에, 간식에 준비물에 또 그 와중 이리저리 널려있는 옷가지 들과, 간식 쓰레기 등을 치운다. 물론 남편도 설거지에 전기밥솥에 쌀을 올려 내일 아침 먹을 밥을 준비한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고 나면 어느 세 9시가 훌쩍 넘고, 아이들 씻기고 저녁 인사까지 마치고 나면 10시가 다 된다. 기진맥진 소파에 누워 핸드폰 들고 조금 끄적이다 보면 자야 할 시간이다.
나에게 반짝반짝 빛을 내며 집안을 구석구석 닦고, 질서 있게 정리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처음에는 집도 깨끗이 질서 있게, 아이들 밥도 매일매일 영양 있게, 남편의 옷도 각이 살아있는 셔츠 준비 하기 등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 나는 회사 일도, 집안일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가 되었다.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은 매일 아파 몇 달에 한 번씩은 링커 투혼을 해야만 하였다.
그때 즈음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어 가던 중 good-enough mother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좋은 엄마. 그때부터 나는 적당히 좋은 엄마, 적당히 좋은 아내, 적당히 좋은 딸, 적당히 좋은 며느리가 되기로 하였고, 물론 연습이 필요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옷을 외면 한채 부엌에 들어가 저녁을 준비하는 연습, 남편과 아이들에게 하는 잔소리를 줄이고 나를 위한 책을 읽는 연습, 가족들이 나에게 부탁을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말하는 연습,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우리 집에 온다고 할 때에는 이번은 어렵겠다고 말하는 연습,
처음에는 어려웠다. 거절을 못하는 편이었고, 질서가 없는 집이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몇 년이 지난 지금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청소하는 힘으로 아이들에게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해주게 되었고, 아이들과 남편에게 쏠리는 관심을 줄여 나의 발전을 할 수 있고, 가족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니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다.
그로 인하여 나는 직장생활도 더욱 즐거워졌으며, 엄마라는 자리 아내라는 자리가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어쩌면
"적당히 대충대충 뒹구는 그 하루가 나의 문을 열어 줄 마법의 열쇠라 믿으면서 말이다"
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사실 나는 조금의 용기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아. 어머님께 전해주면 고맙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