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라는 본질 그리고 목소리
루미의 목소리가 상징하는 것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목소리'라는 장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이 노래를 통해 '혼문'이라는 마법의 장벽을 만들어 악마의 침입을 막는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깊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팀의 리더 루미는 악마와 헌터의 혼혈로 악령의 피가 흐르고 몸에는 악마의 문양이 있죠. 하지만 그로 인해 점점 목소리를 잃어갑니다. 고음 파트를 주로 담당하던 메인 보컬, 그녀에게 이 변화는 단순한 신체적 변화가 아닌 정체성의 위기입니다. 단순히 목소리만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악령화되어 간다는 이야기이며, 팀의 일원이자 개인으로도 무너지는 위기감을 보여주죠.
그러나 루미는 이런 자신의 상황을 가장 가까운 팀 동료들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었고, 악마의 피라는 자신의 ‘본질’을 숨기려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말하죠. 그 본질을 외면할 때, 진정한 ‘나’로 살 수 없다고. 진짜 나를 부정하고 숨길수록 삶은 더 왜곡된다고 말이죠. 루미가 악마의 문양을 숨기고 자신의 본질을 잊은 시간 동안, 그녀는 '나'로서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노래 Golden의 시작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난 유령 신세였고, 혼자였어.
어두워진, 앞길 속에
왕좌를 얻었지만, 전혀 믿을 수가 없었지
내가 여왕이 될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나'라는 존재의 본질
영화는 관객에게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마침 생각나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유퀴즈에서도 소개될 정도로 잘 알려진, 시인 에린 헨슨의 「아닌 것」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 에린 헨슨은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아닌 것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웃음 속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시인은 나이, 옷, 머리 색깔, 이름, 보조개 등 육체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을 ‘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나'를 내가 읽은 모든 책, 내가 하는 모든 말, 아침의 잠긴 목소리, 웃음 속 사랑스러움, 내가 흘린 모든 눈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내가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목청껏 부르는 노래, 내가 여행한 장소들, 내가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나'라고 말하죠.
시인이 말하는 ‘나’는 나의 생각과 판단, 취향이 스며든 삶의 조각들이었습니다.
경험을 통해 내가 좋다고 여긴 것들, 내 삶에 오래 머문 것들,
그리고 고통조차 배움으로 받아들여 내 안에 쌓인 것들.
셀린과 귀마의 ‘목소리’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셀린과 귀마는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셀린과 귀마는 서로 대척점에 선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내면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루미를 어릴 적부터 돌본 셀린은 언뜻 선한 인물 같지만, 그녀는 루미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악마의 문양을 숨겨"
"아니,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해, 문양이 사라질 때까진 숨겨야 해."
이는 우리의 치부, 부끄러움, 약점 등은 숨겨야 하고 '진짜 나'를 드러내면 상처받는다는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SNS 같은 가상의 공간에서 완벽한 자아를 연기하려 들기도 하죠. 사랑받지 못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나의 불안정한 모습을 숨기려는 미성숙한 방어기제인 셈이죠. 영화 속 ‘혼문’ 또한 이러한 방어기제의 상징입니다. 말 그대로 '혼을 지키는 문' 즉 보호막이지만, 오히려 진짜 자아를 억누르고 가두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결국 루미의 악마의 문양이 무대 위에서 공개되면서, 그녀는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무너집니다. 모든 것을 잃은 루미는 셀린을 찾아가 자신의 문양을 드러내며 울분을 토합니다.
루미: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이게 제 본질이에요. 저를 사랑할 수는 없었나요?
셀린: “사랑해.”
루미: “제 전부를요!”
셀린: “이래서 숨기라고 한 거야. 우리는 결점과 두려움을 꼭꼭 숨겨야 해. 그래야 혼문을 지킬 수 있어.”
루미: “제가 지켜야 할 혼문이 그런 거라면, 차라리 파괴되는 게 낫겠어요.”
한편, 악의 화신 귀마는 진우의 내면에 또 다른 목소리입니다. 귀마는 진우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가족을 버린 너의 죄, 이 죄는 사라지지 않아.”
귀마는 끊임없이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존재이며, 이는 우리가 마음속에서 반복해서 듣게 되는 자기 비난과 수치심, 자책감의 화신입니다. 진우는 이 귀마의 목소리에 매번 끌어내려지죠.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죄책감과 자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성장도 사랑도 자유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공연 장면, 루미가 혼자 귀마를 마주하자 귀마는 말 합니다.
귀마: “이제 혼문은 없다.”
루미: “없지. 우리가 새로 만들 거야.”
루미가 셀린과 귀마와 대화하는 장면은 기존의 잘못된 혼문, 즉 자기 억압과 부정을 기반으로 한 방어기제를 깨부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자 선언입니다. 자기 억압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하겠다는 것이죠. 루미는 결국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건강한 자아 수용의 방식으로 전환해낸 것입니다. 즉, 진짜 ‘나’를 억누르던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로 거듭난 순간입니다.
목소리를 잃고, 억누르며 살아온 루미의 여정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우리를 또 하나의 물음 앞에 세웁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다음 글에서는 두 번째 메시지인 ‘진정한 자기 이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