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관성의 굴레를 반드시 벗어나리
창을 열자마자 마음 가는 대로 일단 제목을 썼다. '더럽게 재미없었던 2023년'이라고. 평균의 교양을 생각하니 공개적인 발행글 제목으로는 너무 품위가 떨어지지 않나 싶어 타다닥- 지웠다. 단어를 골라 조금 순하게 바꾸어 보긴 했는데 의미는 결국 같다. 다시 올해처럼은 살지 않아야겠다는 위기감. 몇 가지 키워드를 짚어보며, 올해를 곱씹고 내년을 다짐해 보자.
너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올해 한 세 번쯤 밖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첫인사였다. 와 씨- 너 왜케 피곤해 보이냐ㅎㅎ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그저 호탕하게 껄껄 웃어재꼈지만 세 번째 즈음되었을 때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누가 봐도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정말 최악이다. 그런데 또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이 피로의 굴레에 난 언제부터 갇혀버렸던 것일까.
작년 이맘 즈음, 준수한 성과로 한 해를 정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마도 내년은 올해처럼 굴러가진 않으리라 예상했다. (작년의 결산글) 여러 대내외의 소식들이 낙관적이지 못했기에 매출 하락-수주 감소는 그냥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눅 들지 말고 주어진 바 하나씩 잘해보자- 쫄지 말자! 그렇게 한 해를 시작했었다. 그러나 침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회사를 믿고 맡겨온 클라이언트들은 더 많은 일을 주었고, 새로운 접점들이 또 생기면서 일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더 고마운 마음으로 멋지게 해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컸다.(그것 자체는 결코 괴롭지 않았지만) 그러다 보니 난 또 점점 출근 시간이 빨라지고, 새벽달을 보며 모두가 잠든 고요 속에 출근하는 날이 아주 일상이 되어버렸다. (되도록 저녁은 아내와 딸과 보내고 싶은 고집도 꺾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찍 출근하는 방법뿐이었다.)
올해 최종 수주를 마감하고 총결산을 해보았더니 작년대비 조금 더 성장을 했더라. 콤팩트한 우리 조직으로는 분명 작년 매출이 최선이다 했었는데 기어이 또 조금 지나 한걸음을 더 내디딘 것이다. 와우 우리들 정말 대단해! 보다는 돌아보니 징글징글하다는 느낌이랄까. 개별 프로젝트의 성취감, 고객사와 반짝였던 호흡, 최종 결과물의 쾌감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충분히 그 순간들은 반짝이고 좋은 때가 있었다. 그와 별개로, 그저 피로감만 보자면 그래프의 높이가 곧 피로의 탑이라고 하면 아주 딱 맞을 것 같다. 나도, 우리 직원들도 참 많이 피곤한 한 해였다. 이제 진정된 일정 속에 연말 결산을 공유하고, 그래도 섭섭치 않게 작년보다 더 많은 성과급, 긴 겨울방학(12/12 종무)을 선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대들에게 부족하지 않은 위로가 되길 바래본다. 직원들은 보내지만 난 또 사무실에 남아 잔잔히 일들을 해야 한다. 나는 어디서 위로를 얻어야 할지 몰라 시선이 사무실 허공을 한 바퀴 빙- 돈다. 아-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마주친 거울 속의 내 눈은 또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다.
눈빛만큼은 양보 못해
안광(眼光). 내가 살아오면서 겪어온 경험들로 비추어 나름의 확신이 있는데, 눈빛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의 영민함, 성격, 컨디션, 거짓의 함량(?) 등 잠깐 만나 나누는 대화 속 상대의 눈빛, 눈매의 끝에는 제법 높은 확률로 그를 파악할 수 있는 정성적 에너지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가끔 내 눈을 응시한다. 지금 내 눈빛은 어떤가. 나는 어떤 에너지를 주고 있지?
대학 때 건축을 전공한 나는 건축설계 시간이 참 고되고-즐겁고-고민되고-희열이 있고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천재성이 없음을 스스로 알기에 제법 노력파였는데, 설계수업 한 이틀 전부터는 밤을 꼬박 새워 우드락 보드를 붙였다 떼었다 하며 공허한 스케치를 그리고 또 그리고 했던 것 같다. 그런 설계실에 꼭 설계수업 하루 전날 또는 당일 새벽녘에야 알코올 향기를 진하게 풍기며, 왼쪽 귀에 제도연필을 꽂고 등장하는 형이 있었다.
그의 알코올 냄새는 분명했지만 손끝에는 취기가 없었고, 우드락을 쓰윽쓰윽 잘라 붙이며 금세 교수 크리틱 준비를 뚝딱 해내었다. 참 기운 빠지게도, 언제나 이틀밤을 밤새워 고민한 나의 디자인보다 형의 모델링에서는 빛이 났다. 내가 봐도 그것이 좋았다. 교수님께 그저 예-예-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끄덕이다가, 혼나다가 끝나는 나의 크리틱 시간과는 달리 그의 크리틱 시간은 구경하는 맛도 있었다. 주장이 선명했고, 부딪혔다 꺾였다가 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끝내 그 형과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형이 좋았다. 난 건축 디자인을 포기했고, 세부 전공에서 공학을 선택하여 디자인이 아닌 철근콘크리트의 인장-압축력, 건축물의 냉방부하를 계산하다가 졸업했다.
그 형의 눈빛에서 느꼈던 총기(聰氣). 그것은 내 인생을 관통하는 몇 가지 선명한 경험 중 하나다. 눈빛의 힘은 분명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꼭 맞은 일과 도전을 하며 그 눈빛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눈빛이 반짝일 수는 없지만 나는 몇 가지의 도전과 작은 성취들을 쌓으며, 거울에 비친 나의 눈빛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았다. 어떤 날의 나의 눈빛은 제법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렇게 그저 열심히 달려오다 마주친 오늘의 내 눈빛은 어쩌다 이렇게 충혈이 가득하게 된 것일까.
완전히 다른 방식의 리더십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궂은일을 거절하지 않는다. 스스로 인정이 가능한 성과로 결론을 낸다. 끝나면 미련은 두지 않는다. 이것이 내 인생을 관통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좋게 포장해 보자면 솔선수범! 이 맥락에서 조장도, 반장도 많이 했다. 내가 먼저 이렇게 해버리면 함께 하는 이들이 마냥 뺀질거리기는 눈치가 보이는 법이다. 나는 그 힘으로 앞장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 방식은 내가 학창 시절을 지나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일할 때까지는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자 셀프 리더십이었던 것 같다.
작은 회사의 대표가 되어서도 그 방식은 그대로였고, 성과만 놓고 보자면 역시나 효율적이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굉장히 딴딴한 조직력과 속도로 주어진 미션들을 해내왔다. 다만 누군가가 나에게 KPI를 내려주던 때와 달리 지금은 열린 결말 속에 있다 보니 나는 그 속도와 강도가 조절이 안되고 있는 느낌이다. 보기 좋은 그래프의 성장을 말로만 꺾여도 된다고 했지, 나의 무의식적 관성은 그것을 단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도록 만들려고 애썼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올해가 딱 그 형국) 한계에 이른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멈추지를 못했던 것이다.
대표는 이래 가지고는 안된다. 대표는 망원경으로 먼바다를 바라보며 선수의 방향과 돛을 내릴지 올릴지를 결정할 줄 알아야지, 그냥 가장 열심히 노 젓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 잘 알고 있네) 한계에 이른 오늘, 이제는 정말 안녕할 시간이다. 내 충혈된 눈이 그 모든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연말 결산 공유 미팅에서 2024년을 '안식년'으로 삼겠다고 직원들에게 공언하였다. 나는 중간이 없는 사람이라, 이 정도의 선언을 하고 모두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쉬는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관성을 멈추기 위해 나는 생산 강박을 벗어나서 꾹 한번 참아보려 한다. 중요한 순간에만 해결사를 자처하기로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내려놓아보려고 한다. 사실 지금의 일들은 좀 더 직원들을 믿고 나누어도 된다. 사람이 귀한 이 시기에 나는 너무나 대단한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일을 나누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못했을 뿐이지 이미 준비된 친구들이다. 내려놓고 멍 때려 보는 것. 거기서 다시 새로운 시작이 있으리라 믿는다.
2024년, 재미있어져라!
모든 것을 떠나 참 재미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맨 처음 쓰려던 글 제목처럼! 실제로 올해는 너무너무 바쁜데 한없이 지루하기도 한,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안타깝게도 완전히 가득 찬 한 해였다. 주체적으로 재밌게 살아보고자 회사를 떠나 독립한 것이었는데, 과연 주체적인가 싶을 만큼 매년 등 떠밀려 일을 더더 많이 해왔다. 좋게 말하자면 솔선수범이지만 기어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묘한 고집에 끝내 일을 더 많이 끌어안다보니 이제는 일 속에 잠겨버린 느낌. 삶에 재미라고는 저녁에 반겨주는 둘째의 깔깔거리는 웃음, 연습한 방송댄스를 보여주는 첫째 딸의 거실 공연을 보는 정도. 집에 들어가는 짧은 퇴근길에 길바닥을 보고 내뱉는 긴 숨으로 과연 나의 피로와 어려움을 다 털어내고 집에 들어갔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충분히 행복했는지, 무엇보다 이런 모습을 모르지 않을 아내도 마음이 어땠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냥 냅다 놀아버리겠다. 이제 한번 즈음은 대놓고 쉬어도 될 때 아닐까.
내려놓아 본 적이 없지만, 실제로 해낸다면 이는 새로운 성장이 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회사는 이제야 진짜 '회사'로서 성장할지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모든 인풋과 아웃풋의 중심에 내가 버티고 있던 것을 여러 점으로 나누어야겠다. 나는 좀 쉬었다가 새로운 것을 찾을 것이다. 우리 회사 원포인트 그 자체가 되어준 강력한 팀원들이 함께 했을 때 스파크를 튈 수 있을 재미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흔히 말하는 '신사업'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시도해 볼 여력이 생길 것이다. 그럼 회사도, 내 인생도 조금 더 재미있어지겠지!
한강에 자전거 타러 갔던 게 언제였더라. 바람에 찬기운이 좀 빠지면 일단 그것부터 시작해야지. 그리고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지. 내 인생에, 우리 회사에게 아주 중요한 2024년이 될 것이다. 잠시간 텅 비어있는 시간, 재미있어질 내일을 약속하며 올해를 또 이렇게 마무리한다. 안녕! 진짜 고생 많았다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