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난 유학 생활 도중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을. 때때로 그런 생각도 든다. 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난 프랑스로 가야 했나. 그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도 있고, 유쾌한 추억을 안겨준 이도 있고, 만나지 말았어야 했지만 결국 내가 편협하지 않은 사람이(이런 사람도 참았으니 내 인내심이 한 뼘쯤 더 길어지지 않았을까 싶은) 되는데 일조한 사람도 있다. 사실 이역만리에서 혼자 살면서 별일 다 겪었다.
그중에 가장 황당한 일을 하나 꼽자면, 지하철에서 발 밟힌 사람의 복수(?)다. 만원 지하철이었고, 나는 어쩌다 실수로(맹세컨대 실수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흑인 아저씨의 발을 밟았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를 째려보더니 내 발을 밟는 거였다. 분하다는 듯. 난 분명 죄송하다고 사과도 한 상황이었는데, 이 무슨 황당한 속편인가. 다 큰 어른이? 아이도 아니고? 난 잠시 ‘멘붕’에 빠졌다가 마침 내가 내릴 역이라 급히 내렸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은 뇌리에 콕 박혀있다. 심지어 그 아저씨와 다시 만나면 한 번에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저 사람이야!”).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구나, 나의 이해 범위를 넘는 사람도 있구나,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 아저씨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얼뜨기, 동양 여자애가 일부러 자신의 발을 밟았다고 생각한 걸까. 뭘 보고? 내가 그렇게 장난기 많아 보였나. 만원 지하철에서 장난이나 칠 만큼 여유 있는 인간이 아닌데. 이해를 포기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
뭐 황당한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지만,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낭시(Nancy)에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나의 첫 불어 선생님이다. 어학원 다닐 때 많은 선생님이 있었다. 그 중 첫 시간에 들어온 선생님은 20대 초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대학원생이었고, 예뻤다. 늘씬한 몸매에 갈색 머리, 다크 서클이 가득한 눈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파리지엔(사를로뜨 갱스부르나 카를라 브루니 같은)의 모습이었다고 해야 할까.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시크한 스타일. 말아 피는 담배까지 멋있어 보였다. 센 언니 같아 보였지만, 사실 너무 친절했다(예쁜데 성격까지 좋으면 반칙 아닌가). 학생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고, 무엇보다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초보 선생님이라 그랬나).
거기에 피지컬이 좋은 흑인 애인까지 있었다. 흑인 애인은 종종 그녀를 데리러 학교까지 오기도 했는데, 같이 퇴근하는 그 커플의 모습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곤 했다.
비슷한 또래인데 이미 일과 사랑을 다 잡은 그 인생이 너무 부러웠다. 20대 여성들의 로망을 현실로 만든 사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 역시 불안한 미래를 향해 한발 한발 나가고 있는 20대였을 뿐이다. 그 애인과의 미래도 불투명했을 거고(매일 죽일 듯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취업에 올인해야 할지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흑인과는 헤어졌겠지? 종종 그 선생님이 생각난다.
언젠가 새벽에 단어를 외우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난 약간의 강박에 시달렸다. 자다가 새벽에 자주 눈이 떠졌고, 이상한 불안과 조급증에 책상 앞에 앉아 무작정 불어 단어를 외웠다. 하긴 매일 매일이 전쟁이었으니. 불어는 공부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부모님에게 송금을 받기 위해서는 계좌가 필요했다. 그래서 낭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은행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놈의 나라는 어쩜 그렇게 랑데뷰(rendez-vous, 약속)를 좋아하는지 계좌 하나 만드는 데도 미리 은행 관계자와 약속을 잡아야 한다. 손짓 발짓으로 겨우 약속을 잡고 나서 작전에 돌입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달달 외우는 작전. 하지만 이 작전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상대가 내가 예상했던 답변을 하지 않을 때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작전이라는 점이었다.
갑자기 모르는 단어들이 상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내 머리는 백지가 되고, 입술은 달달 떨리기 시작한다. 결국 ‘보디 랭귀지’에 안되는 영어 단어들이 총동원되지만 아뿔사! 프랑스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혹자는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으로 일부러 영어를 안 배운다고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고, 그냥 영어를 못할 뿐이다(프랑스에서도 영어를 잘하면 능력자로 우러러본다).
결국 뭔가 서류를 더 준비해오라는 말만 겨우 알아듣고, 모든 기가 빨린 다음 허탈하게 은행 문을 열고 나온다. 파김치가 돼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있으면 참, 한국이 사무친다(사무친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처음 느꼈다).
주민등록증만 내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한국의 일의 속도. 자국민이기에 필요한 서류도 없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서 살아야 돼”라는 말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아니 불안해질 때마다 강박적으로 불어 단어를 외웠다.
그날도 열심히 불어의 동사 변형에 대해 머리 아파하고 있을 때 옆방(정확히는 왼쪽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아주 매우 격정적인 멜로 영화에서 들었던 남녀의 신음 소리였다. 처음엔 의심하다(잘못 들었겠지) 내가 생각하는 그 소리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당황했다. 그런 소리를 생방송으로 들은 게 처음이었다! 난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옆방의 여자애가 알까 봐, 알면 민망해할까 봐(너무 착했던 것 같다) 볼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당황해서 볼펜을 떨어뜨렸는데, 아주 조심조심 주워 책상 위에 놓은 뒤 공부를 멈추고 조신(?)하게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썼다. 물론 내가 이런다고 해서 그 소리가 멈출 리는 없었다. 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놀란 내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그러다 오래되고 얇은 프랑스 벽들을 저주했다.
옆방 애는 뻔뻔했다. 미안한 기색(?)도 없이 복도가 떠나갈 듯 자주 그런 소리를 냈다(그런 일을 민망해하는 프랑스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친구와 그 좁디 좁은 기숙사 방에 살림을 차린 듯 했다. 어떤 날은 10시도 안 됐는데,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런 날은 공부를 접고 친구네 방에 놀러 가거나 산책을 했다. 나도 피가 끓는 청춘이었던 지라 그런 소리에 마냥 초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초연해지는 순간도 오더라. 어떤 날은 “또 시작이군”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며 내 할 일을 했다.
나중에 파리로 이사를 가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어떤 날은 아래층 여자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어떤 날은 건너편 집 여자의 자지러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잤다.
다 같이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여름(프랑스는 에어컨 없는 집이 수두룩하다)에는 그 소리의 강도가 더 심해지기도 했다. 듣다 못한 옆집 아저씨는 “제발 잠 좀 자자”고 소리치기도 했다. 얼마나 프랑스다운 풍경인지! 그때마다 내가 사랑과 낭만(?)으로 가득 찬 파리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잠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피식 웃어넘기는 여유까지 보이며.
프랑스에서 겪은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성(SEX)을 대하는 태도였다. 한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특히 여자들끼리는) 불편해하며, 저질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일쑤였지만, 그래서 꽁꽁 감췄지만, 프랑스는 달랐다. 그냥 삶의 일부였다.
TV에서 보디 샴푸를 광고하는데 여자 나체가 나오더라. 물론 중요(?)한 부위는 기술적으로 잘 감추었지만, 여자의 뒷모습 전체는 고스란히 나왔다. 과자를 먹다 충격에 입에 있던 과자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심의에 걸리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래서 아예 전파를 타지도 못했겠지.
한 보험 광고에는 옆집 부부의 신음 소리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부부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 심야 시간에는 무삭제판 19금 영화들이 지상파의 전파를 탔다. 방송이 이 정도니 거리는 더 하겠지. 포스터, 광고물들은 그냥 다(?) 보여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대놓고 양지에서 이야기하니, 성이 더 건강하게 느껴졌다. 사실 성, 섹스라는 게 우리 삶의 일부분이고, 숨겨야 할 일이 아닌데, 왜 우리나라에선 쉬쉬하고 감추려 했나 싶은 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음지에서 더 왜곡되고 잘못된 인식들이 생겨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자주 보다 보니 여자의 나체가 야하게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더라. 이젠 옆집 아줌마의 신음 소리도 그냥 도시 소음 중 하나로 여겨지는 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