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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정 Jun 24. 2024

편견과 혐오를 넘어서는 관계

친애하는 슐츠씨를 읽고

   관계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소통, 배려, 존중을 한데 섞어 이루어져야 하는 관계가 점점 손가락 끝으로 향하고, 손가락은 다시 이빨이 되어 서로의 의견을 헐뜯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듯합니다. '소통'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이 어떤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만들어 주장하는 과정이 썩 건강치만은 않다고 느낍니다. 이는 단지 한 사람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술 발전의 찌꺼기이자 과거에서부터 축적된 무의식적 차별의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적다면 적은 세월을 살았지만 그간 남을 많이도 평가해 왔습니다. 그리고 기준은 완벽이었어요. 완벽이라니, 얼마나 추상적인 개념인가요? 형체도 없는 것을 잣대 삼아 사람들을 헐뜯을 궁리를  다.

   어렸을 적부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국어, 사회, 과학 할 것 없이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익숙한 정도와는 반비례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 안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사회적 동물이란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건강한 관계를 구축하는 동물입니다. 이 중 저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만 겨우 해낸 것 같아요. 저보다 어른들이 규정한 세상 안에서, 적당히 다른 사람들과 말과 발을 맞춰가며 걸었던 거죠. 그랬더니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할 때 저도 함께 검지를 펴는 사람이 된 겁니다.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라나 몸 어느 곳에도 장애가 없이 키워진 저는 경제적,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느낄 새가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죠.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창피한 일인데요, 이를테면, 이런 질문 있잖아요. '가난이란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가?', 책이나 미디어에서는 드물지 않게 '노력으로 가난을 헤쳐나가는' 인물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본인의 노력에 달렸다고 생각했어요. 길바닥에서 절을 하며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저렇게 남의 돈을 뜯어먹고 시간에, 일을 구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보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고, 그들한심한 존재로만 여겼습니다. 여기서 제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들이 가진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만 생각해 보자면, 그들이 가진 것은 단벌의 옷가지와 돈을 담을 바구니뿐입니다. 오랫동안 씻지도, 제대로 한 끼 먹어 배를 채우지도 못했습니다. 일을 구하고 싶지만, 일을 구할 방법을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하다못해 신문이라도 보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무작정 어느 공사장을 찾아가 중노동을 시켜달라 하기에도 먹지 못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때 누군가 만원을 던져주며, 일을 구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적은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피시방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 봅니다. 그렇게 운 좋게 면접까지 보게 되었지만 그의 인상착의를 본 인사책임자가 그를 거절합니다. 다시 길바닥으로 내 쫓긴 그는 구걸을 시작하겠죠.


   일을 구하려는 노력조차 안 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말을, 저의 망상을 섞어 길게도 적어보았는데요. 자본주의사회라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는 축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구걸하는 사람들까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아마 주변에 떠오르는 인물이 한 둘씩은 있을지 모릅니다. 부유한 집에서 자라, 주거나 끼니 걱정하지 않고, 카드빚 한 번 생겨보지 않은 사람들 말이죠. 알기 쉽게 돈으로만 이야기했지만, 권위나 지위도 마찬가집니다. 어쩌면 사회 전체적으로 이런 순환고리가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나 '관계'입니다. 상호 간 존중을 바탕으로 한, 진짜 관계 말이에요. 각자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이 가끔 독특한 행동을 하는 것도, 휴대폰 너머에 있는 사람이 공감하지 못할 댓글을 다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얘기죠.

   그런 이들의 행동에 내 기분이 나빠질 때 쓸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 있습니다. 바로,


"그럴 수 있지"


예요. 타인이 내 가치관과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화를 내기보다는 상대의 상황을 상상해 보며 "그럴 수 있지." 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누가 내 발을 밟고도 사과를 하지 않았을 때, '당황스러우면 제대로 인사를 못하고 갈 수도 있지,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개인이 모든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음을 먼저 알고, 서로 다른 이들 간의 성장 배경을 고려하며 관계를 쌓아나가다 보면, 차별과 혐오 대신 이해와 선의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제 아주 큰, 바람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에 위대한 슐츠씨가 함께 하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타인을 이해하려고 머리 쓸 수고를 덜어줍니다. 이렇게 오늘의 감상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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