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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orn 민주 Oct 08. 2023

머리 쉐이빙 하는 날

넘어져야 보이는 세상이 있었습니다.#4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라도 눈물이 날까 봐 어제 봤던 드라마 생각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항암을 시작하면 머리카락은 뭉텅뭉텅 빠지기 시작한다 했다.

드라마에서처럼 빠지는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울고 싶진 않았었다.

또 골룸처럼 여기저기 빠진 머리를 볼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난 1차 항암 후 컨디션이 좋아질 때를 맞춰서 쉐이빙 예약을 했었다.

서울대 병원 안에는 미용실이 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외부 미용실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됐겠지만 대학병원 내 미용실에선 머리를 민다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안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원장님은 직접 칸막이로 자리를 분리해 주셨다.

그리고 어떤 질문이나 상의 없이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낯설고 이상했다.

머리카락이 있을 땐 머리카락의 무게를 모르고 살았는데 떨어져 나가는 그 순간 그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들고 지고 살았던 걸까?

머리카락뿐이 아니었다.

암진단 이후 인간관계에서도 나의 생활에서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게들이 덜어져 나갔다.

사람관계에서 생겨나는 사소한 감정들과 크고 작은 상처들

그로 인해 매일매일 몸도 마음도 바빴던 나의 지난날들

그 시간 안에 가지고 살던 걱정과 고민들이 숭덩숭덩 떨어져 나갔다.

내가 나를 버려가며 지켰던 모든 것들이 왜 그렇게 중요했었는지 알 수 없게 느껴졌다.

갈등이 싫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게 싫어서 조금씩 나를 눌러가며 유지했던 많은 인간관계들도 나의 생사

앞에선 부질없는 관계란걸 알게 해 줬다.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의 무게만큼 내가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무게들을 감당하며 살았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도 나의 머릿속을 채우고 고민했던 일들이 기억도 안 날 만큼 사소해졌다.

실적에 대한 무게와 사람 관계 안에서의 크고 작은 고민들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다. 뭣이 중한디?

세상에 나를 버려가며 지켜야 하는 것은 없었다.

바리깡이 수차례 오르고 내리더니 스펀지로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끝이 났다.

더 이상은 눈을 감고 버틸 수 없는 시간이 됐다.

용기 내어 감았던 눈을 뜨고 거울을 봤다.

까까머리의 거울 속의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해 보였다.

저렇게 작은데 참 힘주고 사느라 애썼다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나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 하루에도 몇 번씩 보던 거울 속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있었다.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지만 우울하거나 나쁘지 않았다.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동안 아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며 살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내 몸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살피지 않았었다.

밥을 굶고 잠을 안 자면 몸이 다치는 것처럼 어떤 일 앞에서 내 마음은 어떤지 먼저 살폈어야 했다.

병이 안 걸렸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병 때문에 수없이 많은 걸 느끼고 얻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건 나를 만난 일이었다.

예전에는 혼자서는 배가 고파도 식당을 못 들어갔지만 지금은 나를 먹이기 위해 들어간다.

누군가를 배려하기 전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에게 더 많은 마음과 시간을 내어준다.

누구보다 내가 먼저 나의 편이 되어 세상에 다시 서니 든든하고 단단했다.

나를 사랑하는 건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줬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머리를 밀고 나오는데 원장님은 여자치고 안 우는 사람 없다시며 기특하단다.

환자가 된 후로는 이 나이에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여자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선 이상하게 계속 눈물이 났다.

딱히 슬프지는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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