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금의 성격은 어릴 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어떤 점에서는 비슷하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그 비슷한 점이 싫어서 일부러 더 내가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바꿔보려고 노력한 것도 있다.
우리 집 애들을 볼 때마다 나는 어릴 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살았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도 떠오르기도 하고 그게 왜 떠오르는 것이 싫었는지 그때의 감정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지금은 예전의 기억이 아프고 힘들고 몸서리치게 싫었던 일들이 희석이 되어 다가오며 그때의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지난날을 글로 만나 보러한다.
조각 같은 기억이지만 선명하고도 뚜렷한 영화 필름 같은 시간들 속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은 나를 바라보는 시선 보다는 내가 바라보는 내 주변의 인물들 즉 가족들의 모습들이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삼촌들과 이모들 외가댁은 삼남사녀로 일곱 남매이다.
나의 친정엄마는 셋째였지만 딸로는 장녀다. 외할머니는 엄마를 많이 생각하고 의지하며 상의하는 사람으로 대했던 거 같다.
나와 막내이모는 8살 차이가 난다. 어렴풋한 기억에는 나의 먹을 것을 막내이모가 뺏어먹다가 내가 울면 혼났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막내이모를 낳고는 몸이 많이 안 좋아진 할머니를 엄마는 병을 고친다는 좋은 곳을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셨다. 그것도 모르고 어린 나와 여동생 둘 다 데리고 다닐 수 가 없어서 몰래 몰래 나가야 했던 첩보작전에 늘 당했던 나는 저 멀리 골목어귀에 엄마와 할머니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목 놓아 울었던 적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크게 소리 지르며 울었던 것은 첩보작전에 늘 속았던 나는 나보다 여동생을 데리고 갔다는 억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엄마가 필요했을 텐데 그래도 엄마의 선택은 나보다 어린 동생이 먼저였다.
어린 내가 그런 엄마의 마음까지 헤아리기란 쉽지 않았을 이해심이었다.
신나게 뛰어놀고 잘 먹고 있는 나와 늘 잘 먹지 않고 조용한 성격의 동생이 더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울고 나면 막내이모는 나를 달래주기는커녕 어쩔 땐 놀려대기 일쑤였다.
얄미웠다. 이미 골목길에서 사라진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더 이상 울어봤자 어차피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건 시간이 지나야 되니깐 받아들이고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낸다.
그러고 보면 내가 어릴 때도 강했구나. 그렇게 나를 놓고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막내이모에게 맡기고 갔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긴 전까지는 할머니의 치료를 위해 병원을 다니고 집에 돌아오면 나와 여동생을 챙겨야 하는 엄마는 정말 많이 힘들었을 거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코피를 많이 흘렸다. 병원도 다니고 민간요법으로 좋다는 음식도 먹고 약도 먹고 해도 소용이 별로 없었다. 하루에 한 두 시간씩은 코피가 항상 나왔고 코피의 양도 세수 대야로 한 대야는 나왔을 정도다. 자연스럽게 빈혈은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약한 몸은 깡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엄마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다녀야 하고 딸인 나도 좋다는 데를 다 데리고 다녔으니 엄마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간요법을 써가며 해먹인 약은 어린 내가 감당하고 먹기에는 고역스러운 재료들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몰라 버리기도 했었다.
버리기 까지 했던 그 재료 중 하나가 연근이다. 그 재료를 지금은 아주 잘 먹는다.
생 연근을 갈아서 갈변이 된 색을 바라보며 먹어야 했던 나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보는 앞에서 오구 오구 잘한다. 잘 먹는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그 고역스러운 맛을 넘겨야 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돌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을 텐데, 엄마는 싫은 내색 한번을 안 하고 할머니와 가족들을 돌보는 데 헌신된 모습을 보이셨다.
나는 그런 엄마를 넘 든든하고 좋아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