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 소설집) 첫 번째
고등학생이던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공책에 시를 써내려가던 밤들,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질 만큼 진지한 얼굴로 시어 하나, 쉼표 하나를 붙들고 고민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렇게 모은 시를 출력하고, 작은 파일에 정성스레 꽂았다. 아직 시집 한 권 분량은 되지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이미 데뷔 시집이라 불러도 아깝지 않았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국어 교사였다. 문학을 전공한 분이었고, 수업 시간마다 시인의 구절을 읊조리던 그의 모습은 내게 문학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내 시도 그 사람의 입에서 낭송되기를 바랐다. 큰 용기를 내어 방과 후 조심스레 선생님 책상 앞에 섰다. 손에 들린 검은색 파일을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쓴 시예요. 열 편 정도 됩니다. 혹시 시간 나실 때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파일을 받아들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섰지만, 마음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조바심이 생겼다. 열흘쯤 되었을까, 참다 못해 슬쩍 물어보았다.
"선생님, 그 시 혹시... 읽어보셨어요?"
선생님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거?"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에게 무슨 답이 나올까 너무나 설레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분명 긍정적인 격려와 칭찬의 말이겠지? 최소한 더 분발해보자는 격려의 말이겠지? 순간이었지만 선생님 입술의 움직임과 호흡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버렸다."
고개조차 들지 않은 그 말에, 나는 망치로 정수리를 맞은 듯 얼어붙었다. 그의 말투는 무심했고, 표정에는 그 어떤 미안함도 없었다. 마치 쓸데없는 짐을 치우듯, 내 시는, 아니 내 마음은 그렇게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부끄러움이 분노를 눌렀고, 분노가 슬픔을 밀어냈다. 그날 이후, 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 쓰고 싶어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문장이 떠올라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말렸다. 시를 거부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십 년 가까이 글을 놓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국어 교사가 되었다. 아이러니였다.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친 교실에서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다정이였다. 키가 자그마한 중학생 소녀였다. 다정이는 연습장 한 장을 조심스레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 이거 제가 쓴 시예요... 혹시 봐주실 수 있나요?"
그 순간, 오래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손에 들린 그 종이가 낯설지 않았다. 그날의 교실, 그날의 말투, 그리고 그 말. "버렸다." 몸속 어딘가에 잊힌 줄 알았던 감정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절대 그때의 선생님처럼 하지 않겠다고. 나는 책상에 앉아 그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껏 읽었다. 시는 거칠었고 문장은 서툴렀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마음이 있었다. 쉽게 흘려보낼 수 없는 진심이 글자마다 묻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이 표현, 꽤 좋은데? 이 부분은 조금 다듬으면 더 살아날 것 같아. 같이 한번 손봐볼까?“
다정이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며칠에 걸쳐 시를 고쳤다. 문장을 다듬고, 마음을 꺼내고, 언어를 다시 정리해 넣으며 시를 완성해갔다. 나는 공모전을 추천했고, 다정이는 조심스레 그 시를 제출했다.
몇 주 후, 그 시는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플랫폼 유리 위에, 제자의 시가 걸렸다. 우리는 그 역을 찾아가 나란히 시 앞에 섰다. 다정이는 한참 동안 흐뭇한 표정으로 본인이 완성한 멋진 시를 바라보며 만족해 했고,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순간, 열여덟 살의 내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말없이 웃으며, 이제야 알 것 같다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시를 끝까지 읽어주는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안다. 글쓰기의 시작은 ‘쓰는 것’이 아니라 ‘읽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정돈되지 않은 언어 속에서도 고백이 있고, 고뇌가 있고, 삶이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글은 네 마음이 담긴 거야. 나는 그 마음을 쉽게 넘기지 않을 거다. 언제든 보여줘. 내가 제대로 읽어줄게.“
그렇게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찰떡처럼 들러붙은 마음을, 이제는 개떡처럼 투박하게라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