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포즈
파워 포즈라는 개념이 있다.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가슴을 펴고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턱을 약간 치켜드는 포즈. 이 포즈를 취하면 실제로 생리적으로 몸에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자신감 호르몬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몸을 웅크리고 다리를 모으고 손을 앞으로 모으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면 역시나 몸에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약자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이다. 파워 포즈라는 개념을 알고 난 이후부터 나는 카피를 쓸 때 '카피 포즈'를 취하게 되었다. 먼저 브리프를 받을 때는 팔짱을 끼거나 턱을 괴지 않는다. 다리도 꼬지 않는다. 다리를 적당하게 벌리고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밀어 넣고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편하게 펴고 양팔을 벌려서 테이블 위에 얹는다. 이 자세를 취하면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된다. 내 경험상 팔짱을 끼고 있으면 무의식 중에 상대가 하는 말을 방어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턱을 괸 채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그 사람의 말보다 내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카피 포즈를 취하고 브리프를 받으면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 조금 더 빠르게 판단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카피를 쓸 때의 카피 포즈도 있다. 카피를 쓸 때는 모니터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관대한 눈을 하고 모니터 위를 쳐다보면서 가상의 고객과 중얼중얼 대화를 한다. 남들이 보면 미친놈 같아 보일 수도 있다. 입만 중얼거리는 게 아니고 실제 대화하는 것처럼 양팔도 제스처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니터에 카피를 옮겨 적기 전에는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눈을 살짝 감는다. 이 포즈를 취하면 신중 호르몬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만들고 난 후에 머릿속에 있는 말들 중에 정말 좋다고 생각되는 말을 골라서 카피로 옮긴다. 하루 정도 묵혔다가 다음 날 다시 카피를 볼 때는 또 다른 포즈를 취한다. 다리를 꼴 때도 있고 의자를 살짝 틀고 몸을 삐딱하게 앉아서 볼 때가 많다. 맞다. 리뷰받는 사람의 포즈다. 그런 자세를 취하면 조금 더 냉정하게 검수하는 상태가 된다. 좋고 나쁨을 이성적으로 따져 보는 내가 된다. 거의 모든 카피를 쓸 때 나는 이런 포즈들을 단계별로 취하면서 쓴다. 그런데 이런 것은 카피라이터마다 다른 것 같다. 동료들을 살펴보면 골방에 들어가서 쓰는 사람도 있고 누워서 쓰는 사람도 있다. 카페 창가 자리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꼭 연필로 써야 잘 써진다는 동료도 있다. 각자 자기만의 포즈가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건 내가 취한 포즈에 따라 내 몸이 실제로 생리학적으로 다르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원리를 카피 쓰기에 적용해 보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