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시대의 카피라이터

모든 카피는 자서전

by 일조

카피에는 저작권이 없다. 누가 쓴 카피를 베껴서 쓴다고 처벌받거나 벌금을 내지 않는다. 오히려 카피를 쓸 때 다른 카피를 필사해 보면서 베껴 보라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실제로 내가 카피라이터 일을 막 시작했을 때 내 일과의 대부분은 TVCF와 신문, 잡지, 출근길에 받은 브로셔, 회사 출입문에 붙어 있는 전단지 등 하루 동안 접하는 거의 모든 광고물의 카피를 모조리 베껴 쓰는 것이었다. 15초 안에 몇 글자가 들어가면 가장 듣기 좋은 호흡이 되는지, 처음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다음 문장을 읽게 되는지, 어려운 스펙을 관심 있게 보게 하려면 헤드라인 밑에 리드 카피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등 다른 선배 카피라이터들이 쓰고 실제 게재된 카피를 종일 베껴 쓰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신문광고 카피가 엄청 길었던 때였다. A4로 두 장을 꽉 채웠던 적도 있었다. <딱정벌레에게 배우는 광고발상법>이라는 오래된 고전을 구해서 한 글자 한 글자 판서하듯 베껴 썼다. 6년 동안 책 한 권을 통으로 5번 정도 베껴 썼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도 배움의 대상이었다. 4대 비극을 모두 필사하면서 언어의 리듬을 많이 배웠다. 그렇게 베끼면서 내 실력이 늘어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에게 잡지 광고의 바디카피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그동안 내가 베끼면서 좋았던 포인트들과 표현을 적절히 섞어 가며 바디카피를 써 보았다. 사수 카피가 동료 아트 디렉터에게 내 카피를 보여줬고 그분이 한 말은 평생 잊지 못한 귀한 충고가 되었다. “음…… 말은 다 되는데 어쩐지 모자이크 같네. 짜깁기를 아주 잘 한 느낌이야.” 내가 쓴 카피에 내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카피라이터가 아니라 카피메이커였다. 카피 시장에는 유행이 있다. 뭐 하나 카피가 뜨면 다른 브랜드들에서도 계속 보이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 의 시작'이라는 카피다. 앞선 경험의 시작, 한 차원 높은 생활의 시작, 새로운 경험의 시작, 실제로 카피를 쓰다 보면 그런 표현을 안 쓰기가 쉽지 않다. 유혹이 너무 강렬하다. 왠지 저렇게 써야 요즘 트렌디한 카피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가장 경계한다. 그렇게 쓴 카피는 온전히 내 것일 수 없다. 카피의 대가가 되고 싶다면 레퍼런스가 될 수 있는 카피를 써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카피는 저작권이 없다. 하지만 소유권은 있어야 한다. 스스로는 그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건 내가 생각해서 써낸 내 카피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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