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시대의 카피라이터

북풍이 바이킹을 만든다

by 일조

후들후들. 제약이 너무 많다. 일단 보이스 가이드가 있다. 자수 제한이 있다. 꼭 들어가야 할 워드가 있다. 컨펌하는 클라이언트의 취향이 있다. 반영해야 할 트렌드가 있다. 고객의 언어를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쓰고 싶은 표현이 있다. 이 모든 제약을 한 큐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피의 신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하나 해결하는 것을 좋아한다. 먼저 꼭 들어가야 할 워드를 포진시킨다. 그다음 내가 쓸 수 있는 자수가 몇 글자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본다. 빈칸에 어울리는 표현들이 뭐가 있는지 조사해 본다. 주로 요즘 웹에서 쓰는 표현을 찾아본다. 쓸 수 있는 말뭉치, 내가 워드 뱅크라고 부르는 곳에 단어들이 어느 정도 쌓이면 최종 선발전을 한다. 내 마음에 앉혀 놓은 심사 위원은 세 명이다. 클라이언트, 나, 고객 페르소나 각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합산하여 가장 점수를 많이 받은 순으로 줄을 세운다. 위에서 다섯 번째 까지가 왕중왕 전에 오른다. 왕중왕 전의 규칙은 이렇다. 내 마음에 들게 변형되어 써지지 않는 표현은 떨어진다. 다행히 마음에 들게 바꿔 써진 표현이 있다면 빈칸에 넣어 카피를 완성한다. 다섯 후보로 카피 세 개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제안에는 늘 옵션이 필요하니까. 다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러면 패자 부활전이 열린다. 긁어모은 워드를 그대로 쓰지 않는 이유는 카피라이터의 자존심이다. 밥값을 하기 위해서다. TV광고 카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유행하는 말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카피를 싫어한다. 너무 날로 먹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카피 쓸 때의 나는 고생을 즐긴다. 고생해야 재미있고 사랑스럽다. 어려워 보이지 않으면 당최 흥미가 동하질 않는다. 고생고생 해서 뚫고 나갔을 때 끝에 남아 있는 카피를 봐야 뿌듯하다. 스스로 아주 칭찬하게 된다. 자존감도 올라간다. 내 시간이 반짝반짝 해지는 느낌이다. 경험상 이렇게 내 자존감이 올라갔을 때 몸값도 따라 올라갔다. 카피 양과 질만큼 쓰는 속도가 중요해진 시대다. 내 프로세스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목적지로 빠르게 도착하는 것보다는 낫다. 시간을 조금 더 쓰더라도 내 마음에 맞게 쓰는 게 맞다. 카피가 쉽게 써지는 걸 위험 신호로 받아들인다. 전문가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알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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