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줄 없는 공책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다시 쓰고 싶은 부분이 있다.

by 나무가조아

방금 태어난 아기는 줄도 그어져 있지 않은 무제공책이다. 아직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고 어떤 용도로 쓰겠다고 정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제작된 그대로 문방구 진열대에 아직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채 귀한 새것인 그대로 놓여 있다.


내 나이 마흔 중반.. 나는 절반 좀 넘게 쓴 공책이 되어버렸다. 아직 무언가를 적지 않은 장수도 여러 장이지만 이미 앞부분은 그림과 낙서도 있고 필기도 써져 있으며 줄도 긋고 반쯤 접힌 페이지도 있다. 내 공책이지만 이제까지 채워진 것들이 썩 맘에 들지도 않거니와 뭘 써야 할지 몰라서 시키는 대로 적거나 내 의지대로 그리지 못한 페이지도 있다. 또 표지 그림이라든지 속지는 전부 몇 장인지, 어떤 용도인지는 전부 내가 정한 것도 아니다. 쓰면 쓸수록 점점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게 되어갔다. 처음에는 나중에 이런 걸 써야지 하고 꿈꿀 때도 있었고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중반이 넘게 되면서 점차 꿈꾸는 걸 쓴다는 건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하도 곱씹거나 뒤적여서 너덜너덜 해져버린 페이지도 있고 대충이나마 테이프로 보수한 곳도 있다. 또 나는 이쁘게 그린 그림이지만 남에게는 낙서인 페이지도 있고, 그 반대인 페이지도 있다. 그렇게 내 공책은 점점 채워지고 있지만 점점 쉬운 페이지는 줄어든다. 공책에 빈종이가 줄면 줄수록 내가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 하는 걸 쓰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게 된다.


J는 남들처럼 결혼식을 열어 친지와 친구들에게 결혼 선언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누군가와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적어도 직계가족에게는 결혼식을 대신한 자리를 마련해 조촐하나마 자신의 혼인을 규정하는 식사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렇다고 보통의 가족식사나 돌잔치, 칠순 모임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 그 아래쯤의 공력과 시간을 들여 자신이 마음먹고 하기로 한 식사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5년 전 남들처럼 그냥 보통의 결혼식을 치른 나는, 나와는 다른 형식이지만 결론적으로 결혼식의 성격이 될 J의 그 식사 행사를 돕기 위해 이곳저곳 전화도 걸고 함께 직접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비록 예식을 올리지 않더라도 많은 비용과 이것저것 자잘한 준비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데다가 J가 바라는 행사는 일반 가족식사나 돌잔치, 칠순잔치 같은 성격과는 또 전혀 달라서 행사 장소를 정하는 것도 애매했다. 특별하면서 그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예식만큼의 예산이 들진 않지만 또 적게 드는 것도 아니었고, 정한 인원이 많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다녀보니 또 특별히 적은 것도 아니었다.

장소를 알아보러 다니는 이틀 동안 점점 J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나도 인생의 그 페이지를 적어나갈 때 J와 비슷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페이지를 채우기로 맘먹은 이상 써야 했다. 쓰고 싶은 내용이나 구상한 내용과 많이 다를 수 있으나 바라는 바를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써야 했고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후에는 쓰고 싶은 것과 상관없이 놀랍도록 무력하게도 써야 할 내용들로 써지게 됐었다. 아마 J의 우울한 기분은 그런 무력감의 예고가 아니었을까? 내 공책이지만 이런 건 분명 곤욕이다. 하지만 적어야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이상 낙서든 필기든 해야만 한다. 상상과 바람은 점차 현실과 의무로 바뀌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J의 행사를 도우며 내 공책에 기록된 그 페이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은 모두 각자의 공책을 채워나간다. 얼핏 보면 내 공책이니까 쓰고 싶은 대로 써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수가 없다. 채워나가는 것은 어릴 때보다 어렵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의무적이고 반복적인 내용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이미 먼저 적힌 페이지의 공책을 가진 사람은 이제 적으려고 하거나 아직 적지 않은 페이지를 펴고 망설이는 사람에게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적으라고 하기도 하고 또 드물게 자신의 페이지를 자랑하기도 한다.

J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부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낙서와 필기로 이미 지나간 것들을 적어놓은 사람들 대다수는 아직 그 부분이 비어있는 공책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그곳을 채울건지를 고민하는 걸 보면 이미 내 공책에 적힌 내용을 곱씹어보게 된다. 삶이란 공책은 지우개나 수정액 같은 게 있다면 지워버리거나, 다시 적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부디 나와 같은 실수나 오자를 남기지 않길 바라며 남의 공책에 적힐 내용에 참견과 조언을 하게 된다. J의 공책에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이 행사의 내용 대부분이 J와 그 동반자의 원하는 바대로 거의 흡족하게 채워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내 공책이 삶의 여러 페이지가 지저분하거나 못난 기억들일지언정 그냥 그대로 둘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절반 좀 넘게 사용한 이 공책에서 마음에 안드는 내용이 많더라도 공책을 다 쓰는 날까지 조금씩 내려놓아야겠다.

그래서 공책의 반을 좀 넘게 쓴 지금의 나는 갓 태어난 아기의 줄도 그어져있지 않은 저 하얀 새 공책이 소중하고 신중하게 바라는 바대로 잘 사용돠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