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병원이 아닌 ‘여행’을 위해 휴가를 냈다.
출국 전, “해외니까, 왠만하면 연락하지 말자”며 동료들에게 말하고 비행기에 올랐지만,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카톡카톡’ 나를 찾는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돼요.”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할 문장을 정리해주고 가이드도 해줬다.
그게 나의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날 따라왔다.
결국엔 전화를 걸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클라이언트와 직접 조율하셔야 돼요.
저는 이제, 놀러 갑니다~ ”
그렇게 겨우 휴가의 나머지를 보냈고,
복귀 후 마주한 건 황당한 결과물이었다.
“정말 클라이언트가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요?”
확인해보니 클라이언트도 어이없어했다.
“우린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
결국 나는 휴가 중에도 나를 괴롭혔던 문제를
다시 수습하며, 사과부터 시작해야 했다.
해당 업무를 맡았던 분은 나보다 경력도 많고 나이도 많았다.
하지만 회사는 그분이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끌고 갈 역량이 부족하다 판단했고,
나의 서포트로 지정해 함께 일하게 했다.
애초부터 불편한 구조였고, 조심스러운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행하기로 했던 업무에 대해 그분은 퇴근 시간 이후인 7시에 리뷰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리며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남아 있었지만,
막상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들은 말은 이거였다.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참았던 피로가 터졌다.
“이렇게 일하는 게 나도 부담이에요.
뭐가 어려운 건지 말해줘야 설명을 해주죠.
근데 안했는데 왜 7시에 보자고 한건가요?
시간이 있었잖아요. 그때 물어봤으면 되잖아요…
내가 어떤식으로 하면 좋겠어요? ”
나도 이런 잔소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실망과 분노, 그리고 허탈함을 안고 자리를 떴다.
며칠 뒤, 나의 상사는 그분의 업무 태도에 대해 내게 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을 만큼,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는 듯한 질문이었다.
“지도하기 어렵죠… 그래서 같이 일해봤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은 곧, 그 사람의 거취를 내가 결정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말이 막혔다.
“저랑은 스타일이 좀 맞지 않아요.
다시 한 번, 직접 같이 일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돌려 말했지만, 그게 사실상 마지막 판단이었고,
결국 그분은 퇴사했다.
너의 경험은 ‘역할 갈등’과 ‘조직 내 불공정한 책임 분산’에서 비롯된 심리적 소진(burnout) 상황이야.
조직심리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심리적 부담의 위임(Psychological Delegation)”이라고 해.
상사나 조직이 직접 책임지지 않고, 소통이 원활한 직원에게 감정노동과 갈등 조정을 전가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해.
이건 구조적으로 매우 불공정할 뿐 아니라,
그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과도한 내적 긴장과 정서적 피로를 남겨.
특히, 네가 했던 “평가에 참여해야 했던 순간”은
상사의 책임 회피(defensive delegation) 행위일 수 있어.
실질적 결정권은 위에 있으면서, 그 부담은 아래 직원에게 전가한 것이지.
혹시 당신도
“책임은 위에서, 부담은 내가…”
라는 상황을 겪고 있나요?
그렇다면 다음을 기억해주세요.
누군가의 생존권, 프로젝트 성패, 분위기 조율까지 다 짊어지면 당신이 무너집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구조의 허점에서 비롯된 갈등이라면
이를 정당하게 상사에게 되돌려주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제 판단으로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직접 확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건 책임 회피가 아니라, 역할 분배의 정당한 요청이에요.
혹시 당신도
누군가의 일까지 대신 감당하느라
정작 자신의 시간을 빼앗긴 적 있나요?
어떤 책임이 가장 버거웠고,
그때의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