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작은 마을에서 낳은 첫 아이.
나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출발했다. 작은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은 도시에서는 쉽게 하지 못하는 작은 동네만의 색이 담긴 경험을 할 수 있지만 대게 그 경험이 너무나도 함축적일 때가 많다. 나와 내 주위가 그랬다.
지난 번 브런치 첫 글을 쓴 이후로 개인적으로 너무 바쁜 일들이 쏟아져 첫 글 이후에 바로 잠적이 되어 버렸다. 내가 다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 몇몇이 브런치 주소를 알려달라, 글 쓰기는 어떻게 되어가냐 물었는데 차마 글 하나짜리를 아직 알려줄 수가 없었다. (차린 게시물 없으면서도 없어보이는 작가가 되기는 싫었다보다 ㅎ..) 첫 게시물은 나름 비장한 마음을 먹고 회사 반차를 내고 카페에 앉아 2시간 동안 주욱 써내려간 글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작가 등록이 되자마자 퇴사와, 연애와, 사이드 프로젝트 등등의 일상에 사로잡혀 ‘아.. 써야하는데..’로 다시한번 도전과제가 되어버렸다. 역시 사람의 마음이란 작가 도전을 두드릴 때와 나올 때가 영 다르군, 기필코 나는 사람이군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이제 정말 꾸준히 열심히 쓰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결심과 동시에 나의 작업 노트에 어떤 이야기를 먼저 써 볼 것인지 목차의 네러티브 (Narrative)를 적었다. 그제서야 내가 왜 브런치 글 쓰기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는지 알게 됐다. 최근 몇 년간 내가 써야했던 글 대부분은 독자가 분명했고, 내가 뽐내야 하는 아이템이 확실한 형태였다. 회사에서 주로 기사 글, 광고 글, 그리고 연설문 등을 써내렸는데 포인트를 효과적인 순서에 따라 전달하면서 확실하게 우리를 자랑하면 먹히는 글들이었다. 그러니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를 쓰는게 조금 막막했던 것이다. 자랑할 결심도 효과적이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어떤 구성으로 써야하나.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독자를 향해서 나를 이야기 해야한다. 작업 노트에 “글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함축적이지 않은, 단순하지만 읽는 재미와 납득이 가는 구조로” 라고 썼다. 그리고 그 밑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거창해보이려는 말도 안되는 욕심은 애초에 갖지를 말고, 쓰는 과정에서 나도 즐겁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기회로 생각하기”.
그러므로 나의 출발점, 나의 고향, 곧 나의 뿌리인 시점부터 시작해본다.
나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출발했다.
1990년 대, 경상도 어느 동네에 살고 있던 K양과 W군은 친구의 대학 졸업식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 둘은 나중에 W군의 외모를, K양의 성격을 똑닮은 딸을 첫 아이로 맞으며 함께 풍파를 겪는 사이가 된다. 그렇지만 둘의 첫만남 때 K양의 마음에 딱히 큰 울림은 없었다고 한다. W군은 달랐다.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해야겠다 결심 했으며 약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눈이오나 비가오나, 기분이 좋거나 싫거나 점심시간만 되면 꼭 K양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목소리를 듣는다.
K양은 깊은 산골짜기 속 시골 마을의 막내딸이였는데 아버지는 일제 때 강제 탄광 노역에 끌려가 폐가 나빠져 일찍 돌아가셨고 가장이 된 어머니는 삼베를 짜고 구멍가게를 열며 생계를 유지하는 집이었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넘치는 집안이었다. K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바쁘신 탓도 있지만 아버지가 워낙 사랑을 듬뿍 주셨기 때문이다. 같이 메뚜기와 여치 잡으며 놀러 다녔으며 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고 자주 안아주셨다고 한다.
K양이 유년시절에 가장 꿈꾸고 바랐던 건 ‘다양한 경험'이었다. K양에게는 똑똑한 둘째 오빠가 있었는데, 늙은 시골 부모가 놓치고 있을새라 읍내에서 책을 한가득 사와 글을 알려주고, 글이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를 알려줬다. 그렇게 독서가 취미가 된 K양은 깊은 산골짜기 속 마을에 살아도 생활이 영 따분하지 않았다. 책 속의 다양한 세상들이 호기심이 되고 꿈이 되고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K양은 오히려 이게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난했던 K양의 집안이었기에, 그녀가 하고 싶은 걸 스카우트 활동, 소풍, 학부모 초청 등 이 모든게 바스라질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언니들은 모두 시집가거나 공장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K양의 십 대는 불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와 쓰기, 그리고 공부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간 학생이 된다. 그녀의 성장기에 비록 그녀가 꿈 꿨던 다양한 경험은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 노력해서 그녀 손으로 성취를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W군의 아내가 된 K양은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첫 아이를 출산했다. 그렇게 그녀는 내 인생의 출발선을 그려 주었다.
아기가 잠에 들지 않고 우는 밤이면 포대기로 업어 그녀의 둘째 오빠처럼 책을 읽어줬다. 매일을 들쳐업고 책을 읽으니 하루는 옆집 이웃이 그렇게 갓난 아기한테 백날 책을 읽어줘도 애는 하나도 모른다 괜한 고생하지 말랬단다. 그럼에도 나의 모습대로 아이를 키우자는 생각에 책을 놓지 않았다. 아기가 조금 자라자 어릴적 그녀의 아버지처럼 들판에서 메뚜기 잡으며 놀아주고, 세상 속 다양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끊임 없이 해주고, 매일 저녁마다 안아줬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자신이 하지 못한 것들까지 해주겠다는 결심이 들었단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간절했던 스카우트 활동부터 다양한 소풍을 경험 시켰고 당시 넉넉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외식비를 아껴 오케스트라와 뮤지컬 공연을 꾸준히 보여줬다.
내가 초등학교 말 즈음이 될 적부터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어느날, 어린 시절의 그녀가 그랬던 것 처럼 그녀의 딸 또한 책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하고 넓은 세계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내 딸은 넓은 곳에서 꿈을 펼칠 수 있겠다는 기쁨으로 딸의 유학비를 직접 벌어 마련해 주었다.
한 때 K양이었던 내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와 함께 자란 나는 여전히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쓰고, 공부와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고 다국적 사람들과 공부하는 20대를 보냈으며 현재는 국제 사업과 회의를 이끄는 일을 하고 있다. 나 또한 작은 동네에서 자랐지만 내 세상은 결코 작게 끝나지 않았다. 많은 게 그녀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