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 성장의 환상과 실질 성장의 무게

by 구미잉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최근 파월 의장의 금리 동결 결정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게 되는데요. ‘성장도 둔화된다는데, 왜 이렇게 금리 인하에 신중한가요?’라는 의문이죠. 특히 단기적인 시각에서는 성장의 발목을 잡는 답답한 결정이라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시계열을 길게 보는 장기 투자자들의 시각은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번 결정이 장기적인 안정성을 위한 올바른 방향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죠.


왜 이런 시각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월급은 올랐는데 점심값은 더 올라서 오히려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그런 경험 다들 한 번씩 있으시죠? 바로 ‘명목’ 성장과 ‘실질’ 성장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물가 상승을 이기고도 남는 ‘실질 성장’이며, 이를 위해서는 ‘물가 안정’이라는 단단한 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역사의 책장을 한번 넘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1970년대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이죠. 당시 데이터를 복기해 보면, 1974년 말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12.3%에 달했고, 1980년 초에는 14.8%까지 치솟았습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숫자죠. 이런 살인적인 물가 속에서 경제는 성장을 멈췄고, 실업률은 9%에 육박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당시 S&P 500 지수는 10년간 명목상으로 20%도 채 오르지 못했지만, 같은 기간 누적 물가 상승률은 110%를 훌쩍 넘었습니다. 결국 주식에 투자한 돈의 실질 가치는 반 토막이 난 것입니다.


자, 그럼 시선을 지구 반대편으로 한번 돌려볼까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성장’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기괴한 착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베네수엘라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증시는 2018년 한 해에만 명목상으로 17만%라는, 천문학적인 폭등을 기록했는데요. 하지만 그 해 베네수엘라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얼마였을까요? 국제통화기금(IMF) 추정치에 따르면 약 930,000%에 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해 실질 GDP 성장률은 -19.6%로, 경제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버렸어요. 이런 주식시장을 보고 ‘성장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두 가지 사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그 많은 나라를 두고 대피처로서 미국 시장에 장기 투자를 하는 것일까요? 바로 그들은 적어도 이 두 가지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겁니다. 베네수엘라처럼 명목 성장의 환상에 취해 화폐 가치를 붕괴시키는 길 대신, 1970년대의 뼈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물가 안정을 경제의 근간으로 삼으려 하니까요. 물론 정치적인 소음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소음 속에서도 파월의 연준이 보여준 것처럼, 때로는 시장의 단기적인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장기적인 물가 안정을 지키려는 ‘제도적 의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의 자산이 단순한 숫자가 아닌, 인플레이션을 이겨내는 ‘실질적인 부(富)’로 쌓일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결국 자산의 가치를 지켜주는 것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아니라, 느리지만 꾸준히 타오르는 모닥불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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