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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시절-3화

by 분홍소금
이야기에 나온 사건과 인물은 실제와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오여사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사무실에는 3명의 여직원과 기관장이 있었다. '저분이 고상식 관장님이겠지.'

네 명 중 누가 기관장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인사담당자의 언급에서 연세가 좀 있는 분이라고 하셨을 때 늙수그레한 남자인가 보다 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떡 하니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인사담당자가 말해 주기 전에 오여사는 홈페이지의 조직도에서 기관장의 이름을 확인했었다.

그의 이름이 '고상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상식이라면 상식이 높다는 뜻인데, 상식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보통으로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여사는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 00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직원들이 일손을 멈추고 오여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 수가! 직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렇게 늙은 아줌마가 여길 왜 왔지?' 속으로 말하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싸한 분위기에 압도된 오여사는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이윽고 고상식 관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앉아 있어도 의자와 한 몸으로 잘 뭉쳐져 있어 땅딸막한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마에서는 누리끼리한 빛이 흐르고 머리숱은 듬성듬성했다. 확실한 대머리가 되기 직전의 과정을 밟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관 근무자의 정년은 60세이다. 아직도 버젓이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보면 60세에 도달하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얼굴의 주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입언저리에서 턱까지의 피부가 양 옆으로 길고 굵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모양이 흡사 겹겹이 쌓인 똥처럼 보였다.


관장은 오여사를 흘깃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몇 살 이유?" 그 흔한 환영 인사 한 마디 없이 나온 그의 첫마디에 오여사는 적잖이 당황했다. "저... 57세예요, 만으로요." "한 살이라도 적게 보이려고 만 나이를 들이대는 것 좀 봐, 그냥 58세라고 하지." 오여사는 얼떨결에 "죄송합니다." 했다. 그러자 관장은 오여사의 말을 받아 " 어이구, 오죽했으면 저 나이에 이런 데를 다 오나?" 했다.


오여사는 자기도 모르게 관장을 쳐다보았다.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식 밖의 발언에다 엄연한 인격모독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그랬다면 "별꼴이야."하고 말 일이지만 그는 그녀와 한 배를 타고 갈 선장이 아닌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여사는 출근 첫날부터 자기가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집에 들어온 하인에게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성싶었다. 나이 든 것이 이런 모욕적인 대접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이란 말인가.


관장은 한 여직원을 쳐다보며 지시를 했다. "왕수지 주임, 같이 내려가, 그리고 교육 확실히 시켜."

오여사는 또 마음이 상했다. '교육을 확실히 시키라니, 업무를 가르쳐 주라는 말인 것 같은데, 그 말을 저런 식으로 하다니? 여기가 똥개 훈련장인가, 그리고 내가 똥개라도 된단 말인가'

오여사는 사무실을 나서며 '멘털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고 눈앞에 벌어진 일이 어떤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팀장이 관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녀의 눈에는 천하에 막되 먹은 사람처럼 보였다. '팀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하기 전에 진짜 중요한 말을 생략한 건 아닐까? 팀장의 말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을지도 몰라, 내가 진작에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생략된 행간을 잘 알아듣고 단단히 각오를 해야 했는데.' 오여사는 느닷없는 현실 앞에서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마음속에서 그녀의 자아들이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 "푸대접이 아니라 인격모독이 벌어지는 현재의 상황을 쿨하게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하면 다른 쪽에서 "그냥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응징이라도 할 참이야?" 하며 받아쳤다.


오여사는 대학 졸업을 남겨둔 4학년 2학기에 대기업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오성상사'에 출근한 첫날이 떠올랐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같은 과의 직원들이 활짝 웃으며 잘 왔다고 인사를 했다. 과장님이 환영 회식 하자고 한 말을 시작으로 대리님의 회식을 위한 시간과 장소 조율이 이어졌던 기억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3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아줌마야, 그때는 젊었고 지금은 늙었잖아, 모든 게 용서되는 시절이 있고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시절이 따로 있는 거야, 정신 차려." 현실 자아가 교통정리를 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수지가 오여사를 지하 1층 수영장으로 안내했다. 왕수지는 수영장 안내 데스크를 가리키며 앞으로 오여사가 근무할 곳이라고 일러 주었다. "네? 네." 왕수지의 안내 멘트를 들으며 오여사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영장에서 근무하라고? 공채 원서에 분명히 스포츠센터 사무실 근무 파트에 지원했는데?'

오여사가 어떻게 해 볼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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