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나온 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스포츠센터의 직원들은 일반직과 기능직으로 나뉘는데 기능직원들은 수영강사를 지칭했다.
수영장은 강좌마다 강사가 따로 있는 데다가 안전가드까지 포함하므로 다수의 인력이 필요했다. 프로그램은 크게 강습, 아쿠아로빅, 자유수영으로 이루어지는데 아쿠아로빅은 전적으로 외부 강사에 의존하지만 강습강사와 자유수영 시간에 들어가는 안전가드는 수영강사들이 담당했다.
개장 당시에는 강습과 아쿠아로빅이 개설되지 않아 전임 관장이 짜 놓은 대로 자유수영만으로 운영했다. 강습과 아쿠아로빅 개설에 대한 민원이 빗발쳤지만 관장과 수영강사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미루기를 반복했다.
수영강사들은 강습이 없었으므로 하는 일이라곤 자유수영 시간에 안전가드를 서는 것뿐이었다. 강사들은 순번을 정해 한 타임에 50분씩 진행되는 자유수영 가드를 일주일에 세 번은 하루에 2회, 두 번은 3회를 섰다. 그러다 보니 시간 외 근무를 포함하여 하루 9시간 근무 중에 6시간을 대기하는데 썼다. 말이 대기시간이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시간이었다. 업무 시간보다 더 긴 자유시간에 그들은 끼리끼리 뭉쳤다.
수영강사들과 기관장은 코드가 잘 맞았다. 수영강사들도 오여사처럼 교대근무를 했다. 직원들의 반은 출근 시간이 오전 6시였다. 관장은 보통 6시 반에 출근을 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수영장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친 강사들은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 테이블에서 때맞춰 출근한 관장과 함께 미리 준비한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9시까지 티타임을 가졌다. 그 시간에 관장과 직원들이 노닥거리며 웃는 웃음소리와 냉커피의 얼음이 자그락자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출입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현관 출입문은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었는데 9시 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열리지 않았다.
대화의 단골 소재는 맛집과 건강과 여행이었다. 관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피자이야기를 즐겨했다. 프랜차이즈 피자는 피자가 아니라는 둥, 전통방식으로 화덕에 구운 피자가 진짜라는 둥 하며, 자기는 화덕피자 잘하는 집을 일부러 찾아가서 먹는다고 하며 아는 장소를 줄줄이 꿰기도 했다. 직원들은 나이가 들면 한식을 좋아하는 법인데 우리 기관장님은 입맛 취향부터가 남다르다고 추켜 세웠다.
관장은 피자를 먹어도 운동을 열심히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젊었을 때는 나도 헬스 직원처럼 배에 '왕'짜가 있었어. 지금 몸은 몸이라고 할 수도 없어." 그러면 한 직원이 나서서"나이가 들면 살이 좀 있어야 건강하대요." 했다. 최근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에도 열을 올렸다. "다들 스위스에는 안 가 봤지? 말이 필요 없어, 여행을 제대로 다녀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동유럽 서유럽 밖에 모르지, 그쪽으로 옛날에 다 가봤는데 스위스가 더 좋더라고, 돈 벌어서 가 봐, 최고야, 최고." 그럼 직원들은 우리 기관장님 대단하시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계 곳곳을 속속들이 여행을 하며 무엇을 보았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었지만 그에게는 그곳을 갔다 왔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해 보였다.
관장은 갑자기 강좌를 맡은 외부 강사들 이야기를 하면서 맥락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불쑥 꺼내기도 했다. "여러분, 나 욕하는 소리 들은 사람 있어?" "언제요? 못 들어 본 것 같은 데요?" "최근에 00 선생한테 회원 관리 잘하라고 했을 때 말이야, 그때 그놈이 나한테 대들었잖아? 하도 기가 막혀서 욕이 다 튀어나오더라고." "아 생각났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나 욕 잘하지? 그 방면에서 내가 천재야, 여러분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욕도 할 수 있어. 내가 얼마나 욕을 잘하면 2006년을 이천 욕년이라고 하겠어?"
욕 잘하는 게 무슨 자랑일까 싶지만 그의 실없는 아재개그가 그나마 그에게도 솔직하고 소탈한 품성이 남아 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의 뜬금없는 욕개그는 그가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불러일으켰다.
그 시간에 관장은 가장 행복해 보였다. 수영강사들은 흡사 주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고양이들 같았다. 이들은 주인에게서 맛있는 간식을 얻어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가르랑거렸고 주인은 그들의 노력에 상응하는 격의 없는 애정과 맛있는 간식으로 보답해 주었다.
티타임의 마지막에 관장은 수영 강사들을 안심시키는 약속의 말을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더 이상의 수영 강좌 개설은 없다." 관장의 한마디는 강좌 개설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회의 테이블의 그들에게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강좌 개설을 막아 주겠다는 관장의 발언은 업무이야기로 둔갑하여, 그들의 티타임을 사적 모임이 아닌 근무 시작 전 업무 미팅으로 승격시켰다. 관장뿐 아니라 수영 직원들은 마지막 결론으로 찜찜했던 마음을 날려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관장과 아침마다 회의실에 함께하는 여유로운 티타임이 끝나면 강사들은 휴게실에서 잠을 자거나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점심시간에는 근처의 음식점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한 후 아이스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와 오여사의 옆자리에서 수다를 떨었다.
적지 않은 수의 수영강사를 왜 정직원으로 뽑을까 하지만 사실은 직원이 많은 게 아니라 필수 강좌를 좀처럼 개설하려 들지 않는 관장이 문제였다.
오여사는 관장과 직원들의 오전 루틴에 대해 바람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고깝게 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정년을 앞둔 기관장이 오전 한 때 티타임을 겸한 미팅을 통해 직원들과 친밀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티타임미팅이 오여사를 생각지도 못한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오여사의 출근을 시작으로 그들의 유대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끈끈해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여사가 그들의 화젯거리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적군도 가뿐하게 오늘의 동지가 되게 하는 공공의 적이 된 신입 직원 오여사는 기관장과 직원들 양쪽 모두에게 시달리기 시작했다.
오여사는 수영직원이라면 스포츠맨십을 장착한 사람들로 시원시원한 성격에 사소한 손익에 집착하지 않는 대인배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녀가 가까이에서 본 그들에게서는 그런 품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온갖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함) 한 일들이 난무하는 곳에서 살아남은 자들 답게 많은 부분에서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어떤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무의식에서 잠자던 무리 짓기와 텃세, 갑질과 정치질의 기억이 관장을 만나면서 깨어났다.
관장이 오여사를 대하는 태도가 눈치 빠른 강사들에게 전염되기 시작했다. 관장은 4층 사무실에서 지하에 있는 수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영직원들의 입에서 나온 말로 판단했다. 관장은 티타임 시간에 강사들에게 "그 아줌마 어때?"하고 물어보았다. 아줌마는 물론 오여사를 가리켰다. 수영직원들은 관장에게 대놓고 그녀에 대해 악의적인 험담을 했다. "아줌마가 수영장으로 들어가는 외부인을 제 때 제지하지 않았어요, 결제를 하다가 디폴트 값을 실수했어요 장애를 경로로 하더라고요, "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관장은 오여사를 즉시 눈 밖에 난 사람 취급을 했다. 수영직원들도 자타 공인 실세로 행세하며 오여사에게 업무를 빙자한 지적질과 간섭을 일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