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담은 빈 강의실에서 관장님과 직원이 일대일로 만나 업무 비업무 구분 없이 편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오여사는 면담이전에는 관장과 업무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사무실 환경과 업무 방식에서 관장의 주도하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잠자코 따랐다. 속으로 자주 박수를 쳤지만 겉으로는 늘 하던 대로 수영장을 지키며 주어진 업무를 차질 없이 하는 것에 집중했다.
신문에서 읽은 '누군가가 맡은 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간다면 그건 담당자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센터에 입사한 후로 처음 하는 면담이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참고 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속이 후련했다는 직원의 말에 과연 그럴까, 했다.
그 직원은 수영 팀장이 왕수지와 00가 몰려다니며 편 가르기를 조장하는 태도에 불만이 많았었다. 오여사는 그 가 설마 그 얘기를 속속들이 해버렸나, 하다가도 '과잉 관심은 금물이야, 너나 잘하라고' 하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드디어 오여사의 순서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빈 강의실로 갔다. 관장은 커피와 비스킷 접시를 앞에 놓고 휴대폰으로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었다.
따뜻한 봄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관장의 자리와 커피, 비스킷이 놓인 책상 주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햇살이 연출한 평화로운 한 컷 덕분에 오여사의 긴장이 한결 누그러졌다.
오여사가 인사를 하자 관장은 환하게 웃으며 면담의 주제는 '아무 말 대잔치'라고 정했다며 가리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면 된다고 했다.
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회원들이 3층에 와서 오주임님 칭찬을 많이 했어요, 너무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근데 비결이 뭐예요?"
오여사는 수영장 이용자들이 연세 드신 시니어 분들이라 아날로그식 응대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고 대답을 했다.
관장은 "예를 들면요?" 하면서 오여사가 가볍게 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캐물었다.
"프로그램이나 등록기간 안내문에 있는 내용을 알아들을 때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든지 하는 것들요. 기존 회원들 대부분 쉽게 이해하지만 처음 오신 어르신들은 은근히 어려워하시더라고요."
관장은 오여사의 입사날짜와 정년퇴직이 언제냐고 물었다. 오여사의 대답에
공공기관 취업 경쟁이 역대급으로 치열할 때 들어왔다고 하면서 "시험이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결국 해내셨네요" 했다. 자신은 18년 전에 평범한 주부였는데 뭐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 지원했고 면접만 보고 들어왔다며 요즘처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면 들어오지 못했을 거라고 하며 웃었다.
관장은 수영장에서 어려운 점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업무만 두고 보면 수영장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리가 없지요, 대단한 기획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용자를 늘이려고 애써 마케팅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것은 것도 아니잖아요, 어려운 점은 역시 인간관계지요. 왕수지와 수영팀장, 00가 아주 골 때린답니다. 수영장 분위기를 말아먹는다고 볼 수 있지요. 수영 직원이 모두 9명인데 3명이 나머지 6명을 따돌리며 아주 못살게 군답니다. 3명이 6명을 따돌릴 수 있는 이유는 이전 관장이 세 명에게 전 권을 위임했기 때문이에요, 이전 관장이 아주 나빴지요. 솔직히 말해 세 명의 가장 피해자는 바로 저라고나 할까요? 이 사람들이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꼬투리를 잡아 이전 관장님께 악의적으로 일러바쳤어요. 관장님이 그들 얘기만 듣고 저를 센터의 부적격자 취급을 했다니까요."
입을 떼면 할 얘기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관장이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었다.
대신에 오여사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틀에 박힌 대답으로 돌아갔다.
"수영장은 안전사고나 민원만 아니면 크게 힘든 일은 없습니다"
관장과의 면담을 끝내고 돌아오는 오여사의 발걸음이 전에 없이 가벼웠다. 면담의 주제가 '아무 말 대잔치' 라니 그런 말은 공공기관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 할 법한 말이 아니다. 오여사처럼 조직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관장은 리더가 부하직원에게 저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만큼 오여사를 격의 없이 대했다.
직원 면담이 마무리되자, 관장은 수영장 전체 강좌에 추첨제를 도입했다.
기간수료제를 적용하여 강좌 이용 후 1년이 지나면 추첨을 통해 새로 들어온 회원으로 초기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기존 회원들의 반발을 우려하는 일부 직원들에게 주민들의 건강과 삶의 질 향상이 센터 설립의 본래 목적 아니냐, 주민들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어야 한다며 모두가 잊고 있었던 다소 거창한 주제를 환기시켰다.
관장은 추첨제 전환과 일정을 공지하는 안내문을 직접 만들었다. 원래는 왕수지와 오여사가 번갈아 가면서 하던 일이었다. 오여사가 "저희가 하던 일을 왜 관장님이 하세요? 제가 할게요" 라며 황송해 하자 관장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제가 일을 좀 많이 하려고 해요, 특히 왕수지와 팀장이 하던 일을 이제부터 제가 직접 할 거예요. 특정 직원이 제멋대로 센터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원천 봉쇄 하려면 일을 많이 주면 안 되거든요. 일이 없으면 힘도 빠지는 법이니까요, 아참 이건 오주임만 알고 계세요."
오여사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