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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승 Nov 06. 2019

2. 내 아이의 첫 번째 타인

대치동에서 좋은 엄마를 꿈꾸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아이를 재우려 나란히 누웠는데 아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른을 보고 인사를 안 한 아이를 나무랐던 날이었다. 아이는 엄마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부끄러웠던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가 미웠다고도 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었는지 엄마는 몰랐어. 너도 화나면 인상 쓰잖아. 딸이 미웠던 건 아니야.”

“나는 안 그래”

“너도 엄마 째려보면 무서워.”

“나는 몰랐지.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잖아.”

“아...!”


내가 딸아이를 나무랄 때 어떤 표정인지, 나는 본 바 없다. 그러니 부모로서 내세운 권위가 딸아이에게 어떤 공포나 불안으로 다가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내 얼굴을 모른 채 살아간다. 눈이 촉수처럼 신체를 마주하지 않는 이상 나는 나를 마주할 수 없다. 타인의 삶을 돌보는 부모 역을 자임한 나지만, 나조차 확신할 수 없는 나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거울 단계 개념을 통해 나를 볼 수 없는 나를 확인시켰다. 직접 본 바 없는 나를 나는 언제 처음 인지했을까. 라캉에 따르면 생후 6개월 정도의 아기가 거울 앞에서 “어! 나네” 라고 환호하는 순간, 나는 형성된다. 제 팔 다리를 휘두르곤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리던 아기가 거울을 통해 ‘이게 다 내 꺼’라는 신체의 총체성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 환희의 찰나, 라캉은 찬물을 확 끼얹는다. “착각이야.” 라캉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이미지일 뿐 실제의 넌 아니지.”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시인 이상(1910-1937)이 시 <거울>을 통해 읊조렸듯, 거울 없이 나를 대면할 방도는 없다. 그런데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라는 구절처럼, 이편의 나를 비춘 저편의 거울 속 나는 내가 아니다. 눈을 통해 비로소 나를 발견했으나, 그렇게 지각된 나는 이미지일 뿐이라니, 이리 허망할 수가 없다.

Pablo Picasso, Girl before a Mirror, 1932

그럼 거울 속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나라는 실체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가시화된 유일한 형상이기에 신기루라 치부할 수도 없다. 거울 자리에 타자를 세워보면 그 정체가 구체화된다. 그러니까 거울 이미지는 타자의 눈에 비친 나, 나의 이미지인 셈이다.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타인의 눈을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타인 없이는 나일 수 없다. 그리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 첫 번째 타인은 부모이기 마련이다


흔히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를 거울에 빗대곤 한다. 아이가 부모의 거울로서, 부모의 됨됨이를 비출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아이가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비추고, 이상적 자아를 설정해 그 모습을 따르려 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그래서 최초의 거울은 어머니의 얼굴이라고 특정되기도 한다(‘어머니’의 역할만 강조된 주장에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거울을 사이에 둔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이는 인간의 자아가 머리 아닌 눈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과도 관계된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볼 것인가. 아이는 부모라는 첫 번째 타자를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기에 부모의 시선은 아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 부모가 아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본다면 아이는 스스로가 불만족스러울 테고, 부모의 애정 가득한 눈길을 받은 아이는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것이란 얘기다. 그러니 아이를 향해 긍정적 시선만 듬뿍 던져주면 아이는 건강할 수 있을까. 바라봄, 시선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부모가 아이의 첫 번째 타자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부모가 유일한 타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라캉 식으로 풀이하면 부모의 시선으로 아이를 옭아매지 말라는 경고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나를 비춘 거울 이미지가 실제의 내가 아니듯, 아이는 부모와도 동일시될 수 없다. 나는 수많은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추고, 그 이미지는 제각각이듯, 부모 또한 아이를 비추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런 부모가 정작 제 얼굴도 모르면서 자식을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인 셈이다. 나는 누구보다 내 아이를 사랑하지만 아이를 비추는 내 거울이 오목거울일 수도 있고, 볼록거울일 수도 있다. 형상이 반영될 때 이미지는 언제나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다시 물을 수밖에. 그래서 내 아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나야. 그렇지?』라는 독일의 아동철학서에는 오이멜론이 나를 찾아 ‘물음표산’을 오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이멜론은 시작도 알 수 없고, 그 끝도 장담할 수 없는, 갑자기 그 자리에 서 있게 된 존재다. 다만 오이멜론이라 불릴 뿐인데, 오이멜론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물음표가 가득한 커다란 산을 향해 길을 나선다. 길 위에서 소도 만나고 원숭이도 만나는 오이멜론은 소도 아니고, 원숭이와도 다른 자신이 궁금해 여정을 계속 한다. 산 입구에 다다른 오이멜론은 매표원의 질문을 받게 된다. “너는 누구지?” 답을 알 수 없어 낙담한 오이멜론이 말한다. “모르겠는데요.” “맞아! 들어가도 좋아” 물음표산에 오르게 된 오이멜론은 생각했다. “내가 아주 독특한 존재라라는 걸 말해 줄 누군가가 저 꼭대기에 살고 있을지 몰라”


오이멜론은 아마 물음표산을 오르며 무수한 존재자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과의 차이 또한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같지 않음에 실망할 테고, 때로는 다름에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내 딸아이가 오이멜론이라면 그 곁에서 여정을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실 물도 건네주고, 부채질도 해주고, 때로는 말동무도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말해주는 나는 어떻게 다를까?” “나를 나답게 하는 건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해댈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수많은 존재자들이 있지만 인간은 그 가운데서도 존재함을 인식하는 독특한 존재다. 하지만 하이데거(1889-1976)도 해명했듯 세계에 내던져진 우리로선 다만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우연으로 자기 개별성에 대한 자각도 없이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를 자각하며 실존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물음표산을 오르고 올라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우리는 불안한 존재다. 하이데거가 역설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 즉 실존은 불안을 마주함이며 그래서 매 순간 고민하는 삶이다. 나는 나조차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러니 아이의 거울이 될 생각은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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