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가 ‘서약서’이라면, 과업지시서는 ‘생활 수칙'

#공공계약의 시선

by 조민우

"계약서 도장만 잘 찍으면 끝난 거 아닌가요?"

계약 업무를 처음 맡은 주무관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다. 그들은 계약서(표준협약서)의 오탈자나 금액, 계약 기간에는 현미경을 들이대며 꼼꼼히 확인한다. 하지만 정작 그 뒤에 두꺼운 별첨 자료로 붙는 '과업지시서(또는 시방서)'는 전임자가 쓰던 파일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곤 한다.

이것은 마치 결혼식장은 화려하게 꾸미면서, 결혼 후 누가 설거지를 하고 누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지는 전혀 합의하지 않은 부부와 같다.


1.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표준계약서는 일종의 '결혼 서약'이다. "우리는 갑과 을로서 신의와 성실의 원칙에 따라 서로 협력한다"는 아름답고 추상적인 선언이 담겨 있다.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이 서약이 우리의 구체적인 결혼 생활, 즉 '실무'를 지켜주지는 못한다.

진짜 싸움은 "사랑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양말을 왜 뒤집어 벗어놓느냐"는 사소한 생활 습관에서 터진다. 공공계약도 마찬가지다. 업체와 싸우게 되는 지점은 거창한 법률 조항이 아니라, "보고서는 몇 페이지로 할지", "청소 인력은 몇 시에 출근시킬지" 같은 디테일이다.

이 디테일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과업지시서(생활 수칙)'다.


2. '성실히'라는 단어의 함정

많은 담당자가 과업지시서에 이런 문장을 쓴다."수급인은 발주기관의 지시에 따라 성실히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 문장은 아무런 힘이 없다. '성실히'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공무원에게 성실함이란 '문제가 생기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하는 것'이지만, 업체에게 성실함이란 '계약된 근무 시간인 9시부터 6시까지만 일하는 것'일 수 있다.

사고가 터졌을 때 업체가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나오면, 담당자는 할 말이 없어진다. 추상적인 문구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어 결국 담당자의 발목을 잡는다.


3. 업체를 움직이는 건 차가운 한 줄이다

유능한 감독관의 과업지시서는 차갑고 구체적이다. "성실히 보고한다" 대신, "매주 금요일 오후 4시까지 주간 업무보고서를 이메일로 제출한다"라고 적는다."깨끗하게 청소한다" 대신, "매일 오전 8시까지 복도 물걸레 청소를 완료한다"라고 적는다.

분쟁이 발생해서 법원이나 감사원에 갔을 때, 판관은 당신의 억울한 감정을 보지 않는다. 오직 과업지시서에 적힌 텍스트만을 본다. 그때 당신을 지켜주는 무기는 계약서 표지의 직인이 아니라, 별첨 자료 구석에 적어놓은 구체적인 과업 내용 한 줄이다.


4. 복사 붙여넣기의 유혹을 끊어라

전임자가 쓴 과업지시서를 그대로 쓰는 건, 전임자의 배우자와 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대가 바뀌면 법이 바뀌고, 현장이 바뀌면 과업의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계약서는 '우리가 함께 일한다'는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일 뿐이다. 그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호 간의 구체적인 약속, 즉 잘 쓰인 과업지시서다.



"계약서는 관계를 맺어주지만, 과업지시서는 관계를 지탱한다."

업체와 얼굴 붉히지 않고 일하고 싶다면, 오늘 당장 당신의 과업지시서를 다시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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