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 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설한장 Oct 03. 2022

주간 씀 모음 15

느긋한 오후


예전


나는 예전과 달라졌을까?

그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다. 눈앞에는 빈 술잔이 놓여 있었고, 손에는 비싼 손목시계가, 몸에는 깔끔한 정장이, 의자 옆에는 풀어헤친 넥타이가 늘어져 있었다.

달라지긴 했네.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메아리는 그의 헛된 상념을 쫓듯 머릿속을 흔들었다.

‘너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그 시절 그대로야!’

그는 술병을 잡고 그대로 들이마셨다. 



아무 말 없이


아무 말 없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별거 아니라고요? 아니에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저도 잘 알고 있거든요. 자기 할 일도 많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데요. 그게 가능한 건, 당신이 정말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무거움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나는 가방 아래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힘주어 들자 동그란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야, 뭐 하는 거야.”

“무겁지?”

“됐어. 그냥 놔.”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들어주고 싶은 기분을 너는 왜 모를까. 아니, 혹은 아는데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계속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바삐 걷는 와중에는 불가능했다. 나는 결국 가방을 든 손을 뺐다.

“야!”

거센 항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갑작스레 떨어진 가방에서 충격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저런.

미안해, 고의가 아니야. 인생이 그런 걸 어쩌겠어. 무거운 짐이 잠시 가벼워졌다 싶으면, 곧이어 큰 충격이 오기 마련이지.



혼돈


춤추듯 내려온 혼돈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래. 나는 스스로 납득했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불쑥 손을 내밀던 아버지는 몇 살 때의 기억일까. 그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고 힘이 살아 있었다. 힘줄 솟은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작은 참새를 내 손 위에 올려주었을 때, 전기가 통하는 듯한 설레는 감각이 손끝에서 움직였다. 아마 그때가 시작이었나 싶다. 허망하게 놓쳐버린 참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게 된 것은.

간절히 원하는 것일수록, 손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손가락 사이로 손쉽게 빠져나가곤 한다는 것을 나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배워왔던 것이다. 



일생


일생에 걸쳐 한곳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면. 나는 과연 유의미한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주간 씀 모음 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