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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Sep 08. 2022

어떤 연설

  저는 원래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학생 시절엔 줄곧 안경을 끼고 생활했었죠. 그렇게 안경의 지배하에 생활하던 저는 군대에서 막 제대한 어느 날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라섹 수술을 접하게 됩니다. 지긋지긋한 안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아주 꿈만 같은 수술이었죠. 그 후 저는 불편한 안경에서 해방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안경에서 해방되었지만, 지금도 가끔은 안경을 쓰곤 합니다. 바로 이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인데요, 자극이 강한 블루라이트를 차단해 시력일 보호해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써 보니 안 썼을 때 보다 눈이 덜 피곤해지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제가 이 안경을 쓰는 이유는 시력 보호 말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빛입니다.

  이 안경을 쓰면 세상이 조금 노란빛으로 보인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제가 본 그건 단순한 노란빛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오후 네시의 나른한 햇빛처럼, 모든 것이 포근하고 느긋하게 보이는 빛이었습니다.

  이 느긋한 분위기에 사로잡힌 저는 시험 삼아 안경을 살짝 벗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푸르고 번쩍이는 빛이 저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안경을 썼을 때 보다 좀 더 생기가 흘렀지만, 동시에 눈부시기도 한 세상이었죠. 마치 아침에 힘겹게 눈을 뜨자마자 창문 밖으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 눈부신 햇살과 같은 그런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 안경을 씁니다. 우리는 늘 아침에 일어나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보며 그만큼 활기찬, 혹은 그보다 덜 활기찬 하루를 보냅니다. 하늘은 푸르고, 세상은 방금 태어난 것처럼 반짝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멋진 세상이죠. 그래도 전 가끔은 모든 일을 내버려 두고, 반짝이는 세상을 잠시 모른 척하고, 한껏 게으름 피며 꾸벅꾸벅 졸음에 빠지는 세상으로 떠납니다. 바로 이 안경을 쓰면서 말이죠. 오후의 나른한 햇살에 잠시 몸을 맡긴다 해도 뭐 어떻습니까. 반짝이는 세상은 우릴 기다리지 않고 저 멀리 가버릴 수도 있지만,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하품을 하며 쫓아가도 괜찮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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