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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Jan 27. 2022

경력은 대체 어떻게 쌓는 걸까?

 경력은 대체 어떻게 쌓는 걸까? 입사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만으로 되면 좋겠는데 자격증 사본을 포함해 경력 증명서를 내라고 한다. 그럼 초년생은 어떻게 할까? 경력이 단절된 채 오래 지난 사람은? 그런 사람은 절대로 경력을 쌓을 수 없는 게 아닐까? 한참만에 어딘가로 취직이라는 걸 해보려니 이놈의 경력이 발목을 잡는다.



 지금 당장 입사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제 너무 긴 시간 사회생활-이를테면 봉급을 받고, 승진을 하고, 월차를 쓰는 등의-을 하지 않아서인지 막상 무언갈 해보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시간을 피해 여러 일들을 해보기도 했지만 오래 일하지 못했고, 휴직과 복직을 넘나들 수 있는 공고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건 전공을 이용한 글쓰기 과외였다. 그마저도 여러 사정으로 지금은 못하고 있고.


 기실 아이 둘 기르면서 틈틈이 용돈 벌어 쓰고, 살림하고 아이들 치다꺼리하면서 사는 내 삶도 괜찮다.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않든지 간에 전업주부로서의 모든 일은 소중하고 값지다. 하지만 스스로 이상하게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취미는 독서와 글쓰기인데 나이 마흔에 아직도 장래희망을 꿈꾸다 보니 그것에 매진을 핑계로 남편에게 모든 경제적 짐을 떠넘기는 기분이어서 자주 불편했다. 자기 취미 생활에는 고약하게 인색한 남편이 아내의 꿈을 위해서는 물심양면 힘써주니 미안했다. 17년째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하여 보수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그 정도는 내가 누릴만한 합당함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밤과 낮이 수시로 바뀌며 하루에 만 보씩 걸어야 하는 남편의 피로함이 짙은 연기처럼 내 눈앞에 실재할 때마다 자꾸만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간절했던 이유. 기회가 왔을 때, 그게 내 자리라고 인정받았을 때 꼭 해내고 싶었던 이유.

 


 지난주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도립 도서관에서 고전문학 북클럽 담당자를 뽑는 자리에 추천받아 서류를 준비했다. 추천받고 제출까지 남은 기한은 사흘. 공고문을 꼼꼼하게 살피며 준비해야 할 서류를 하나하나 챙겼다. 누런 각 봉투에 구김 없이 담고, 며칠 전에 내린 눈으로 질퍽해진 골목길에서 행여 놓칠까 더욱 꼭 쥐고 들고 갔다. 독서모임 리더를 뽑는데 내세울 이력이라곤 시립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 동아리 회장을 8년째 역임하고 있다는 것뿐이어서 기타 사항에 그걸 적었다. 갖고 있는 논술지도사 자격증과 방과 후 강사로 일한 이력도 적었지만 그건 칸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곳은 지원팀이었다. 문 위에 걸린 팻말을 몇 번씩 확인하고 들어갔다. 책상 여덟 개가 마주 보고 있는 큰 사무실이었다. 자리에 앉은 공무원 여섯 명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우렁우렁 한 내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올라가지도 않는 노래를 억지로 부를 때처럼 얇게 떨렸다.


"저... 북클럽... 고전 북클럽 지원자인데요."

"아, 북클럽요. 잠시만요."


 한 사람이 일어나서 내게 응대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던 일로 시선을 옮겼다. 오른쪽 두 번째 앉은 사람이 담당자였지만 통화 중이었다. 나는 몇 초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서류는 다 챙겨 오셨나요?"


담당자는 봉투에서 내 서류를 과감하게 꺼내더니 훑어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 데다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어딘지 움츠러드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큰 탁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어서 나도 앉고 싶었지만 앉아야 하는지 몰라 초조하게 서 있었다.


"선생님, 방과 후 강사 하셨네요. 경력 증명서를 뗄 수 있을까요?"

"뗄 수는 있는데 그만둔 지 5년이 훨씬 넘었고, 지금 학교가 방학 중이라 서류 마감일까지 내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여기 ㅎ도서관에서 일하신 건 경력 증명서를 떼 올 수 있으세요?"

"그건 제가 수당을 받고 일한 게 아닌데."

"그래도 도서관에서 만든 독서모임을 운영하신 거 아니에요?"

"네. 맞습니다. 오래 했어요."

"아, 그러시면 ㅎ도서관 담당 주무관님께 부탁드려서 경력증명서를 떼어 주세요."


 더는 망설이는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추천받기는 했지만 내정된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 나보다 경력이 화려한 사람이 이력서를 제출한다면 나는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그가 경력 증명서까지 완벽하게 해 가지고 와서 낸다면 그 확률은 높고 짙어질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이미 담당자는 자기 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거절당한 외판원처럼 침울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차로 돌아와 도서관에 전화를 걸었다. 독서모임 담당 사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경력을 증명해 줄 서류를 떼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이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시립도서관이 30개 정도 있는데 도서관마다 독서모임을 돕는 멘토 제도가 있다. 멘토들은 도서관에서 지급하는 수당이 있어서 경력을 증명하기가 수월하지만 단순히 모임을 진행하고, 회장을 맡았다고 해서 그 경력을 증명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 도서관측 의견이었다.


 멘토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12개월까지 계약을 한다. 우리 독서모임도 초기엔 멘토가 있었다. 멘토는 각각 석 달쯤 우리 독서회에 머물렀다. 나는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그 도서관의 독서모임 장을 맡고 있다. 자그마치 8년이었다. 도서관 연합회에서 주관하는 도서 지원을 받으려고 밤잠도 반납하고 서류 작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가끔은 인터넷에서 독서모임 지원사업을 하면 구구한 사연을 적어 당첨이 되게 했고, 조건으로 할당된 서평은 쓰기 힘들어하는 회원들을 대신해 맡아서 썼다. 또, 시에서 문집을 만든다고 리뷰를 제출하라고 하면 회원들을 설득시켜서 우리 글이 실리게 도왔다. 코로나로 모임이 어려울 때는 줌으로 진행했다. 공치사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나야말로 증명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안된단다. 서식이 없어서. 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찾아가서 더 상세하게 말했다. 나는 부탁이 승낙되지 않을 때 설득을 하려 드는 편이다. 거절당했을 땐 상대의 대답이 다소 이해가 안 되더라도 두세 번 이상은 구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하니까. 이번엔 여러 번 설득했다. 섭섭함도 토로했다. 같은 말만 돌아왔다.


 끝내 돌아서는 발걸음에 무형의 허망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원한 것은 종이 한 장이었다. 가짜 증명서가 아니라 돈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유로이 모였지만 ㅎ도서관에서 독서모임 진행자로 함께 했음을, 실존하는 사실을 맞다고 적어달라는 것뿐이었다. 거절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돼서 파고들었다. 순간, 남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돈도 돈이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일 하면서 인정받으니 좋겠다고 말하던 설레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하지 말 것을.


 결국 구인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담당자는 알겠다고 했다. 차라리 '그럼 채용이 어렵겠네요'라고 말해준다면 속이 시원했을까? 일단은 발표를 기다리고 있지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증명되지 못한 자의 시간이 또 흐르고 있다.


 이번에 합격할 수 있다면 나도 경력이라는 걸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온다면 힘차게 증명서를 떼러 이 도서관으로 다시 올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여전히 나는 또 경력을 쌓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경력이 없으니까. 경력이 없어서 경력을 못 쌓고, 좋아하는 일은 저만큼 더 멀어진다.


경력은 쌓일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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