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스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알리사, 샤미, 샘, 클로이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자리가 나는 썩 즐거웠다. 커피를 마시며 전날 일과와 뉴스거리를 갖고 두런대는 시간이 푸근했다. 알리사는 언제나 악동 제임스가 저지른 사건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감기에 걸린 제임스가 밤새 자기 얼굴에 대고 콜록대느라 곧 자기도 몸져 누을 것이라는 등, 밥 먹이기가 힘들어 비엔나 소시지에 스파게티 면을 꽂아 문어 모양으로 삶는 끔찍한 요리를 했다는 등의 소식을 들을 때면 일과 육아에 지친 엄마의 고생이 느껴지면서도 그래도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에 대한 애틋함이 뚝뚝 흘렀다.
클로이는 거의 매일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파서 일어나기 힘들었거나 열차를 놓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을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회사에 나오는 모습이 딱해 보였다. 나같이 뿌리가 없는 이방인은 집을 아무 데나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는 시드니에서 집을 찾을 때 직장과 가까울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아침에는 SBS를 비롯한 주변 산업단지를 돌아다니는 셔틀을 타고 출근했지만 올 때는 슬슬 걸어올 수 있는 거리였다. 출퇴근 인파에 휩쓸리고 말썽과 연착이 적지 않은 시드니의 대중교통을 견뎌야 했다면 내 삶은 끔찍했을 것이다. 자기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도 만만찮았다. 알리사와 샘이 매일 아침 하는 소리는 어드메에 사고가 나서 길이 너무 막혔다, 주차장이 꽉 차서 애를 먹었다는 불평이었다. 대도시의 교통체증과 주차난은 인생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들이었다.
샤미와 샘은 아직 부모님들과 살고 있었다. 샤미는 이민자 가정의 특성답게 부모님의 과보호를 받는 모양이었다. 샤미는 가고 싶은 곳도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은 젊은 방송인인데 아직도 부모님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적잖은 갈등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의 가정을 많이 봤다. 멜버른에 살 때 한 한국인 가족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고종 오빠의 사촌의 언닌지 뭔지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관계의 친척이었데 어머니는 먼 외국 땅에서 내가 그렇게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기 바라는 눈치였다. 그 가족과 저녁을 먹었다. 나는 한국 사람 가족을 만나면 교회 나오라는 얘기 할까 봐, 여자 친구나 결혼 얘기가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회 나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교회는 나도 많이 다녀봐서 알만큼 안다고 대답해도 자기들 교회는 다르다고, 젊은 교회라고 했다. 그 말도 매번 들었다. 다른 교회는 다 틀리고 자기 교회만 맞다는 똑같은 말이었다. 그 집의 딸은 나와 나이가 비슷했다. 공공기관에서 웹디자인을 한다고 했으니 그녀 역시 젊고 잘 나가는 현대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집에서는 저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티가 팍팍 났다. 통금시간까지 있다고 했다. 딸과 부모님들 사이에서 그 긴장감이 느껴졌다. 부모 자식이나 부부의 사이처럼 서로가 너무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또 저런다' 싶은 얼굴을 하거나 별 거 아닌 것 같은 말에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기가 일쑤였다. 그 미묘한 전기를 내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부모님들은 호주 사회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인 공동체에서 벗어나면 이곳 사람들은 다 술이나 마시고 약이나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영상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 처음엔 참 막막했다. 페이스북을 스크롤링하다 보면 가끔 재밌는 게 보이기도 했는데 SBS라는 곳의 ‘톤'과는 어울리는 콘텐츠가 아니었다. 회사의 톤, 혹은 성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해선 무작정 인터넷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서 기사나 영상 하나를 클릭하고 거기서 또 다른 것을 클릭해가다 보면 재밌고 새로운 웹사이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밌고 기발한 것들을 만드는 대표적인 곳이 버즈피드였지만 그 정도로 유명한 회사의 영상 아이디어를 따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버즈피드 외에도 콘텐츠를 생산하는 플랫폼들은 많았다. 동물 관련 뉴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곳도 있었고, 공예와 미술만 다루는 곳도 있었다. 일본의 기상천외한 소식들을 모아둔 웹사이트도 있었다. 그런 곳을 한 번 발견하면 나는 즐겨찾기 폴더에 저장했고 매일같이 들어가 최신 콘텐츠들을 확인했다. 동물, 공예, 일본문화는 SBS의 소셜 미디어 청중들에게서 가장 인기가 많은 소재들이었다. 동물이 나오는 영상은 누가 봐도 귀엽고 재밌었고 공유도 잘 됐다. 공예 콘텐츠는 중장년의 여성들이 특히 열광했는데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주 연령층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일본문화는 귀엽고 엉뚱한 요소가 많아서 소셜 미디어 영상에 제격이었다. 서양 사람들, 특히 백인들 특유의 일본을 동경하는 성향도 한몫을 했다. 인터넷을 들쑤시며 영상 거리를 캐내는 것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됐다. 근무시간에 인터넷 서핑을 하기도 했지만 남들 일할 때 재밌는 거 찾겠다고 혼자 인터넷에 빠져 있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보통 퇴근하고 집에서 했다. 일을 마치고 오면 한두 시간은 꼭 인터넷 서핑을 했다. 그러면 아이디어 두어 개 정도는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못 찾으면 로이터 통신이나 AP 통신과 같은 대형 미디어사들의 웹사이트를 찾았다. 로이터와 AP는 전 세계에 뉴스 콘텐츠를 제공하는 회사들이었고 이들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만들었다. 가끔 한국이나 일본에 관한 흥미로운 뉴스가 보일 때도 있었다. 한국에 쌀로 만든 빨대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그랬다. 플라스틱 대신 쌀을 이용해 친환경적인 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는 기발하고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강아지 유치원 영상도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 반려견이 늘어나며 강아지 돌봄소가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며 급기야는 강아지를 위한 유치원까지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강아지들이 모여 노는 모습, 다 같이 낮잠 자는 모습, 알림장에 강아지의 하루를 적어 보호자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모두 참을 수 없게 사랑스러워 시청자 마음을 사로잡기에 그만이었다.
한국 관련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구에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나라 뉴스가 자주 다뤄지는 건 그만큼 세계의 관심이 큰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 내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정보도 훨씬 쉽게 수집할 수 있고 영상 속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느낌이었다.
뉴욕타임스를 읽다가 한국의 한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할머니들이 졸업했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기사를 읽고 다음 날 아침 아이디어를 냈을 때 알리사도 같은 기사를 읽었다며 내게 조사를 맡길 생각이었다고 했다. 영상을 만들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영상과 사진이 필수였다. 뉴욕타임스의 사진을 쓰는 건 명백한 도용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학교 웹사이트를 찾았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기사가 난 이후로 많은 언론사들이 앞다퉈 찾은 모양이었다. 몇 가지 인터뷰 질문과 함께 학교 사이트에 있는 사진을 쓰게 해 달라는 허락을 받았다. 할머니들이 수업을 하는 사진과 졸업식 사진이 영상에 들어갔다. 영상 마지막 즈음엔 한국의 방송국들이 만든 영상을 조금 잘라 몇 초를 넣었다. 이는 '공정이용'이라는 저작권법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너무 많이 쓰이지 않는 한, 그리고 돈이 목적이 아닌 한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동의 없이 쓰는 건 어느 정도 허용이 된다는 법이었다. 그러나 공정이용은 아주 애매한 법이기도 했다. 논쟁의 여지도 많았고 더욱이 인터넷에 사용자들이 만드는 콘텐츠가 넘쳐나면서 어느 선까지가 공정이용인지 판가름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었다. 이 역시 한국과 관련된 영상이었다. 한국에서 '탈코르셋'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접했다. 이는 한국사회의 숨 막히는 성역할 강요를 거부하겠다는 여자들의 운동이었다. 특히 여자다운 화장, 여자다운 복장을 정면으로 저항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밀거나 집에 쌓여있던 화장품을 망가뜨려버리는 영상, 그런 자신의 전과 후의 모습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것이 모두 탈코르셋 운동의 일부였다. 시각적으로 무척 돋보일 뿐 아니라 그 의미도 중요했기 때문에 알리사의 지지를 받으며 영상을 만들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탈코르셋 콘텐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영상과 사진을 조금씩 잘라 2분이 조금 안 되는 영상을 만들었다.
영상이 올라가고 며칠 후, SBS 페이스북에 메시지가 왔다. 탈코르셋 영상에 자신의 콘텐츠가 들어갔다며 지워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사람의 콘텐츠가 몇 초간 쓰였는지 계산하여 영상 전체 길이와 비교해 봤다. 또 콘텐츠의 출처를 정확히 적어놨는지도 확인했다. 그걸로 공정이용을 정당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 입장에서는 탈코르셋이라는 의미 있는 운동을 더욱 널리 알린 것인데 도리어 영상을 내려달라는 요구가 불합리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럴 의무는 없었지만 우리는 영상을 지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게 맞는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리사는 내게 미안하다며 내 영상을 'Kill'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저널리스트들의 표현이었다. 'Kill the piece'라든지 'Kill your darlings'라는 말은 글 쓰는 사람들은 꼭 한 번쯤 접하는 말이었다.
이 사건 후로는 소셜 미디어 콘텐츠를 쓸 때마다 적어도 쓰겠다는 말 정도는 댓글란 같은 곳에 남기는 예의는 보이기로 이야기가 됐다. 허락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몇 초 정도 쓰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사람들의 대답을 일일이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영상 아이디어를 내면 그날이나 다음 날까지 만들어 올리는 게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