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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Sep 11. 2024

하드보드지 필통을 아시나요?

추억여행

등굣길에 아들에게 물었다.


"교체해야 하는 G스트링이 하이야? 로우야?"


연말에 있을 작은 발표회를 준비하는데 우쿠렐레에 필요한 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악기 줄을 바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필요시마다 줄을 바꿔 끼려면 귀찮지 않을까? 연주회가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줄을 바꿔야 하나?'


줄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건지, 기존에 썼던 줄은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분주하다. 악기를 직접 고쳐서 쓰는 장면이 떠오르자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너는 사용하던 물건이 망가지면 직접 고치거나 다시 새롭게 만들어서 쓰는 게 좋아? 아니면 냥 버리고 새로 사는 게 좋아?"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필요한 물건이면 고치고 안 쓸 거면 버리고."


언제나 중립을 지키는 녀석.


어릴 때도 항상 그랬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마, 아빠."



"엄마는 어렸을 때 직접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게 좋았어. 기술시간에 도면을 그렸는데 0.1mm 오차도 없어서 엄마가 그린게 전시되고 그랬었어. 근데 지금 뭘 만들어서 쓰라고 하면 귀찮아서 못 할거 같아."


한껏 추억에 잠겨 옛이야기를 하다가 번개처럼 뇌리에 스친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시절 손재주 없던 친구들도 한 번씩은 만들어봤다는 하드보드지 필통! 요즘 아이들은 뭔지 잘 모르는 필통이다. 차가 신호에 걸려서 멈추자 바로 검색해서 보여줬다. 아아~~ 사진으로 보니 정말 반갑다.


"우리 주말에 만들어 볼? 겉에는 너희가 꾸미고 싶은 대로 꾸미고.. 어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난 심플한 게 좋은데..."


아들은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깔끔한 것이 좋다고 하는 거 보니 이 긍정신호이다.


"근데 나 쫌 엉뚱한 생각이 들었어. 슬라이드 필통을 만드는 거면 속을 파내서 만드는 건가 하고 말이야."


"무슨 필통을 클레이로 만드냐? 학교나 빨리 가..!"


하하하~~~!!!!


녀석의 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부터 늘 엉뚱한 생각을 하던 녀석이다. 사회에 물든 어른의 시선으로 봤을 땐 분명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이었다. 하지만 한창 사고력이 유연한 꼬마친구의 생각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어쩔 땐 우리가 놓친 것들을 꼬집어내고 미처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에 감탄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무궁무진한 생각들이 꽉 찬 녀석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획일화된 사회에는 참신한 생각들이 필요하다. 작은 생각의 변화가 또 다른 미래를 구현할 테니까..


마음껏 생각하고 꿈꿔라!


정답은 시험지에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정답의 어디에도 없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을 뿐.. 엉뚱한 상상력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무모해도 괜찮다. 무모하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남들이 다 가는 길로 가지 않더라도 좋다. 믿음과 신념만 있다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도 상관없다. 길 끝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으니까..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미리 알지 못하는 것처럼 미래를 장담하고 가는 사람은 없다.


아침부터 홀로 심오한 사색에 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철학적이다.



아이들보다 더 기다렸던 주말이 왔다. 무슨 일이든 하기로 결정하면 추진력이 강한 편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남편이 설명서를 프린트해 왔다. 아니 이런 건 되는대로 적당히 만드는 거 아니었나? 대충대충 빨리빨리 해버리는 성격인 나와 달리 남편은 꼼꼼하다.


하드보드지를 주문할 때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제일 큰 사이즈에 2mm 두께의 종이를 선호했던 나와 달리 남편은 만들기 쉬운 1mm의 두께와 딱 한 개의 필통이 나올 수 있는 사이즈를 주문했다. 만들고 싶은 사이즈가 다 다를 텐데.. 높이를 높게 만들고 싶은 나는 최대로 끼워 맞춰도 3cm밖에 나오지 않아 불만이었다.


막상 전개도를 그 때도 우린 달랐다. 이미 어떻게 만드는지 머릿속에 그려진 나는 자와 연필을 잡고 시원시원하게 쭉쭉 그려나간 반면 남편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고 구상하다가 조심스럽게 전개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생소한 모습은 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전개도에 수평을 맞추는 것이 어려운 아들에게 나만이 고 있던 팁을 알려주었다. 두꺼운 종이를 처음 잘라보는 녀석은 조심조심 칼질을 해나갔다.


세상물정 모르고 그저 해맑기만 한 우리 꼬마친구는 왔다 갔다 하면서 구경하느라 정신없다. 직접 만드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즐거운 아이다. 처음 필통을 만들어보자 했을 때 그냥 사면되지 그런 건 왜 만드냐고 되묻는 당찬 꼬마 녀석이다.


 뚝딱뚝딱 종이를 잘라내고 필통을 완성했다. 나와 같은 전개도를 그린 아들도 곧잘 따라왔다. 남편은 아직도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수납상자를 주문한 딸아이의 것이다.


"자~! 이제 기본 틀은 다 만들었으니 본격적으로 꾸며볼까? 꼬마가 갖고 있는 아이돌 포토카드를 붙이면 어때?"


그 시절 우리는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을 잡지에서 잘라서 꾸몄었다. 하드보드지 필통연예인 사진으로 도배되는 것이 국룰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달랐다.


"아니, 난 깔끔한 게 좋아."


"... 그런데 포토카드를 붙이면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질걸? 친구들이 신기하다고 할 텐데?"


연예인에 큰 관심이 없는 녀석들에게는 별나라의 이야기였다.


"좋아. 그럼 대신 포장지라도 붙여볼까? 스티커도 붙이고."


하드보드지 민낯을 어떻게든 가려보고자 혹시 몰라 준비한 포장지를 급히 잘랐다. 녀석이 좋아하는 색으로 골랐는데 암만 봐도 예쁘지가 않다. 그냥 선물상자처럼 보였다. 예술의 혼이 깨어나서 좀 더 꾸며보고자 이것저것 붙인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해 보였다. 역시나 미적감각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심플한 게 최고라던 아들은 포장지로 정말 깨끗하고 깔끔하게 포장했다. 다 만들어진 필통마음에 드는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마무리는 역시 투명시트지로 말끔하게 감쌌다.


주말아침부터 우리 가족은 필통 만들기에 푹 빠졌다.


학창 시절 내가 즐겨 만들던 것을 아이들과 함께 하니 뜻깊었고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필통을 만드는 남편도 신나 보였다.


아... 직접 만들어서 쓰던 하드보드지 다이어리는 아직도 어딘가 깊숙한 곳에 있을 텐데... 조만간 집정리를 하면 다시 꺼내봐야겠다.



"엄마아~~~~~~!!"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었다.


"오늘 필통 가지고 갔는데 인기가 진짜 많았어. 친구들이 다 와서 이게 뭐냐고 물어봐. 그래서 말인데 친구가 하나 만들어 달라는데 엄마가 주면 안 돼?"


"뭐라고오?!"


정말 못 말리는 딸아이는 오늘도 과제를 잔뜩 내주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필통을 자랑했을 딸아이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결국 필통 만들기 공장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 철저한 분업화로 내가 그린 전개도를 남편이 자르고 꼬마의 생각대로 포장해서 생산했다. 아이 친구에게 줄 거라고 보다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필통 만들기 공장은 재료가 소진될 때까지 운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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