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트 디자이너가 이직을 결심하게 된 이유
이상하게도, 일이 제일 익숙해졌을 때부터 나는 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정말 나한테 맞는 걸까.’
큰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장 떠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맡은 일은 잘 돌아가고 있었고 역할도 분명했고 기대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부터 ‘잘하고 있다’는 감각보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라는 질문이 더 자주 떠올랐다.처음에는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 남아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이 질문이 계속된다면 어쩌면 나는 이 일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결국, 그 질문을 모르는 척하기보다는 그 질문을 기준으로 새로운 시작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4년동안 몸담았던 조직을 떠나 이직을 선택했다. 이번 선택은 어떤 답을 얻어서 옮긴 결정이라기보다 나에게 일이 어떤 의미인지,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지 그 질문을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어서 한 선택에 가깝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에서는 ‘포스트모템’이라는 이름으로 한 시기를 돌아보고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놓쳤는지 정리하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 형식을 빌려 지금 이 전환기를 한 번 정리해보고 싶었다. 이 기록이 지금 조직 안에서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에게도 조금은 솔직한 참고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의 방식이나 결과를 떠나 거의 모든 일에서 배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고신입 프로덕트 디자이너였던 내가 시장과 실무 안에서 요구되는 역량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남은 건 ‘나’에 대한 이해였다. 어떤 업무에서 에너지를 얻는지, 어떤 상황에서 쉽게 소모되는지, 어떤 사람들과 일할 때 가장 몰입하는지. 그리고 나는 제품의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와 맥락,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원해서 시작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리더로서의 경험 역시 중요한 배움이었다. 구성원을 지원하는 일, 조직과 개인을 동시에 설득하는 일을 부딪히며 배웠다.
이전 조직에서 나는 세 가지 역할을 경험했다. 프로덕트 디자인팀의 리더였고 하나의 제품을 담당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였으며 동시에 디자인 시스템 팀의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여러 역할을 맡으며 빠르게 성장했고 내 역량을 시험해 볼 기회도 많았다. 일을 맡으면 그 안에서 재미를 찾으려 했고, ‘잘 해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은 나름의 좋은 복지와 좋은 동료들, 그리고 안정적인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크게 불편할 것도 당장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설득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주어진 일들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일하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 사람인가’보다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빠르게 해결하는가’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더 깊게 고민하면 전혀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는 순간에도 눈에 보이는 해결로 빠르게 수렴하는 선택을 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오래 붙잡고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는 새로운 자극과 몰입, 그리고 다시 천천히 고민할 수 있는 여백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조직을 떠나는 선택은 나 자신을 다시 성장과 도전의 국면에 두기 위한 결정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 신호들이 더 크게 느껴졌던 이유는 처음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의 나와 너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했고 답이 바로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더 오래 붙잡고 있었으며 새로운 제안들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안정적임’과 ‘익숙함’에 기대어 안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변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다. 당시 회사의 캐시카우는 제품보다 다른 영역에 있었고 그에 따라 조직의 우선순위도 제품을 깊게 만드는 일보다는 주어진 범위 안에서 빠르게 성과를 만들어내는 쪽에 더 많이 놓여 있었다.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며, 제품과 사용자, 데이터를 오래 붙잡기보다 정해진 요구를 빠르게 구조화하고 형태로 옮기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잦아졌다. 그런 조건 안에서 일하다 보니 문제를 정의하는 디자이너라기보다 이미 정해진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역할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환경에서 성장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고 느꼈던 신호들은 꽤 구체적이었다.
임팩트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조차, 더 깊게 붙잡기보다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해결 방안으로만 정리하고 있을 때
문제를 이해하는 시간보다 이미 다른 사람이 떠올린 해결안을 시안으로 만드는데만 많은 시간을 쓰고 있을 때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예전에 통했던 방식을 해결책으로 삼거나 누군가의 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아이디어를 내도 “공수가 안 맞아서 어렵다”는 말이 먼저 떠오르고 그 말에 스스로도 쉽게 수긍하고 있을 때
‘이거 왜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점점 사유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안정적으로 잘 해내는 것보다 다시 서툴게 배우고 성장하고 싶었다. 이미 익숙해진 방식으로 성과를 내는 것보다 아직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더 오래 고민하고, 더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실패할 수 있는 상태를 스스로에게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음 챕터에서는 역할이나 타이틀보다 ‘어떤 문제를 어떤 태도로 다룰 것인가’에 더 집중해 다시 초심에 가까운 디자이너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화면보다 문제를 먼저 보고, 결과보다 이유를 더 오래 붙잡고, 제품과 사용자 앞에 충분히 머물고 싶다.
최근 내 주위에는 디자이너를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된다라는 동료들이 많아졌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이 방향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못한 채, 그냥 익숙함 속에서 버티고 있는 동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혹시 지금,
‘조금 지루하다’
‘예전만큼 설레지 않는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일까’
같은 생각이 스쳤다면 나는 그 생각이 꽤 깊은 고민에서 시작된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 역시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물렀고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 선택이 정답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또, 이런 고민을 다시 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그 질문을 덮어두기보다 해결책을 찾기로 했고 새로운 환경과 자극 속에 나를 두는 쪽을 선택해보기로 했다 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다음 챕터로 나아가고 있으며 지금 다시 ‘서툰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는 길 위에 서 있다. 이 글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아니구나’라는 공감과 작게나마 움직여볼 수 있는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