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마치고 일기를 쓰려니 그곳에서 느꼈던 그 수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정리하나 싶어 방학 숙제를 밀린 학생이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지금 정리해두지 않으면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있겠지. 이번 여행에서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천천히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두고 싶다.
인천-베이징-파리까지(2024.7.26.~7.27.)
내 항공편은 베이징 12시간 레이오버 후 파리로 가는 일정이었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임시 체류비자를 받고 잠시 나가 자금성도 보고 북경오리도 먹고 싶었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참, 임시 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여권 사진과 실제 내가 너무 달랐는지 질문도 여러 개 많이 하고 의심스러운 눈빛과 미심쩍은 표정으로 비자를 내줬다; 올해는 여권 갱신하면서 꼭 사진 바꿔야지...)
야무졌던 기존 계획
나는 계획을 바꿔 바로 환승 호텔로 이동하여 쉬기로 했다. 직원에게 예약 내역을 보여주고 20분 정도 기다린 후 픽업 차량에 탔다.
호텔은 전반적으로 괜찮았으나 직원들의 업무가 과중해 보였다. 리셉션에는 계속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 또한 그들의 뒤에서 기다렸으나, '줄을 선다'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조금 다른 중국인들이 앞으로 밀고 들어와 직원들에게 자신의 요청사항을 먼저 말했다. 직원들은 일이 바쁘니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지는 않았고 응대하는 태도도 좋지 않았다.(마치 간호사 시절의 나처럼.. 그래서 너무 이해가 되는^^)
여차여차해서 체크인을 했고 방을 배정받아 올라왔다. 룸은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좋았다.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던 나는 중국 지도 어플로 검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1층에 내려가 매너리즘에 빠진 직원들에게 식당을 추천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귀찮은지 호텔 바로 옆 식당을 추천해 주었다. 그곳에서 주문한 만두는 별거 아니어 보였는데 정말 맛있었다.
피가 두꺼운데 밀가루 맛도 거의 안 나고 묘하게 촉촉한 것이... 역시 오리지널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외국 나가서 김치 먹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한국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김치 같은 것처럼 말이다.
만두를 먹고 배가 불러 호텔 앞을 거닐다가 애인과 잠시 통화도 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한국보다 조금 선선한 듯한 날씨와 노을 지는 하늘. 처음 와보는 나라에서 식후 산책이라니.. 제법 낭만 있잖아.
올라와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2시간가량 쉬는 시간을 가졌다. 새벽 2시 비행기라 11시에 공항 픽업 차량을 타러 내려갔다. 분명 체크인할 때 예약을 해두었는데 저녁 직원은 알지 못했고(역시나), 30-40분 기다리다가 차를 탈 수 있었다.
다시 도착한 서우두 공항에서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탑승구 앞 의자에 누워있다가 비행기를 타서 기내식만 먹고 바로 곯아떨어졌던 것 같다. 그때 간단히 적어놓은 것을 보니 순례길 시작도 전에 몸살이 날 것 같다고 적혀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는 거의 6시간을 내리 잤다. 굉장히 불편하게 잤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내식도 첫 끼는 영 불편하고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더니, 두 번째 기내식은 편하게 잘 먹었다. 이렇게 긴 비행은 처음이었는데 나는 금세 적응했고, 에어차이나는 나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파리-바욘까지(2024.7.27.)
왜 하필 내가 가는 날..
파리에 떨어지자마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파리 올림픽 개막일에 맞춰 파리 고속철도인 떼제베(TGV) 운행 라인에 방화 테러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파리 몽파르나스역부터 바욘역까지 가는 떼제베를 예약해놨었다. 모든 열차가 운행 중단되었다.
대안을 알아보아야 하는데 설상가상 유심까지 되지 않았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오전 6-7시 경이었고, 유심 개통은 9시부터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일찍 도착하는 경우엔 유심을 도착 전일 개통으로 신청하여 구매하는데, 설명을 상세히 읽지 않은 내 불찰이었다. 나는 와이파이존을 찾아다니며 다른 이동 방법을 검색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고속철도 대신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고속철도로는 6시간이면 바욘에 도착하는데, 버스는 10시간이 소요되었다.(그것도 순수 이동 시간만.. 중간 경유 시간까지 합치면 13시간이 걸렸다.) 마음 같아서는 몽파르나스역까지 가서 열차 운행 여부를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괜히 헛걸음을 하고 버스까지 놓치느니, 그냥 아예 단단히 마음을 먹고 버스를 타자 결심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아름다웠던 기존 계획..
애써 웃어보이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렇게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던 지하철(RER)에서, 에펠탑을 만났다. 예정대로 기차를 탔다면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올림픽 때문에 너무 복잡하고, 예약도 어렵고, 물가도 비쌀 것이라 파리 관광은 계획에서 뺐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를 해결하느라 진이 빠져있던 나는 눈앞의 에펠탑을 넋 놓고 바라봤다. 기분이 좋아졌다.
선물 같던 순간
무사히 정류장에 도착했다. 도착해서도 내가 제대로 온 것이 맞나 한참을 확인했다. 파리에서의 첫 뺑오쇼콜라를 사서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예정 시간에 맞춰 왔고, 3시간을 달리고 3시간을 휴식한 후 다시 7시간을 달려야 했다.
들판을 달리면서 여러 회화 작품들이 떠올랐다. 얘네들(?)은 맨날 이런 풍경을 봐서 그걸 그림으로 그린 거였구나. 내가 한국에 살아서 이국적으로 느껴졌던 거군.
환승을 위해 내린 도시는 명칭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도시에서는 터키 음식점까지 천천히 걸어가 양이 엄청난 플레이트를 먹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20분쯤 걸으면 까르푸가 있다길래 그곳에서 간식과 물을 사면 되겠다 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막상 가다 보니 대부분 차로 까르푸를 다니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었고, 고가 아래를 지나는 등 대낮인데도 약간 위험해 보였다. 되돌아가는 것도 답이 없는 것 같아 서둘러서 걸었다.
까르푸에서 무엇을 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이때 납작복숭아를 처음 사서 먹었던 것 같다.(까르푸에서 계산하는데 내게 배낭을 열어서 확인해달라고 했다. 첫 인종차별이었던 듯..)
납복은 다음날 순례길 위에서 먹었다
다시 바욘행 버스를 타려고 일찍부터 가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내 옆에는 아들과 함께 휴가를 온 여자분이 앉아계셨고 우리는 스몰톡을 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서 독일에서 살고 있다는 그 분은 아주 다정했다. 내가 버스를 놓친 게 아닌가 계속 걱정하자 같이 찾아봐주기도 했다.
예정된 시간으로부터 40분 뒤에 버스가 도착했다.(...) 심지어 나는 플릭스버스 어플도 깔려 있었는데, 도착시간 지연에 대한 아무런 알림도 없었다. 당연히 메일도 감감무소식이었고. 어쨌든 버스를 놓친 게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연두색 버스를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국의 시스템들이 얼마나 잘 되어있는지 체감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탄 버스 안은 에어컨 때문에 추웠고, 외투라고는 얇은 바람막이 하나가 전부여서 모자를 쓰고 손을 끝까지 소매 안으로 넣은 채 선잠을 잤다. 그렇게 바욘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였다.
정신없이 오는 와중에도 호텔에 메일을 보내 이러이러해서 체크인이 새벽인데 괜찮니?라고 묻고 괜찮다는 답변까지 받아놨었다. 호텔에 도착해서는 첫날이라 잘 들리지도 않던 영어로 설명을 듣고 올라가 씻고 침대에 고단한 몸을 뉘었다.
순례길 시작 전에는 푹 쉬어줘야지라며 예약한 무려 16만원짜리 호텔이었는데, 새벽 한 시에 도착해 겨우 네다섯시간 눈을 붙이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바욘-생장까지(2024.7.28.)
처음으로 계획대로 된 하루
6시쯤 일어나 조식을 먹었다. 조식은 훌륭한 편이었다. 과일이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보다 달다고 느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호텔의 조식 퀄리티가 괜찮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어제 개고생+버스에서 덜덜 떨며 잤던 것 때문에 감기 기운이 좀 있었다. 생장에 도착하면 미리 약을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식을 먹고 바욘 기차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모녀도 마주쳤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기차(TER)를 탔다.
낮에 본 호텔
바욘 기차역
한 시간 후 생장에 도착했고, 기차에서는 나와 함께 전세계의 순례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드디어 생장에
나와 함께인 건 7kg의 배낭 뿐
아직 순례길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오는 길이 상당히 험난했다. 생애 처음으로 온 유럽. 그것도 온전히 혼자. 통제성향이 맥을 못 추는 예측 불가한 모든 것들.
분명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 무엇도 통제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통제할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일상에서는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특별한 일이었다.
떼제베가 취소되고 버스를 타기 위해 억지로 올라탄 지하철에서 기적적으로 만난 에펠탑처럼,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나 그래서 재미있는 거지. 긴 여행의 겨우 둘째 날을 지나며, 이미 나는 인생을 관통하는 교훈 하나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