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오래된 한 친구가 있다. 가명은 수나.
한때는 오로지 수나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내 속의 생각들이 수나의 입에서 줄줄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우리의 뇌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뺑뺑이에서 떨어져 낯선 고등학교에 홀로 진학했던 나는 수나를 만난 덕분에 3년을 아주 즐겁게 보냈다. 기질 자체가 세심하고 조용한 편인 나와 달리 화끈하고 털털하고 재밌는 성격의 그에게 나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결이 다르기에 또 너무 어렸기에 수나에게 상처를 받았던 기억들도 있다. 가끔 선을 넘는 장난을 치거나 나를 무시하듯 말했던 일, 집이 어려웠던 나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실수를 했던 말들.. 그럼에도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정신 놓고 깔깔거리던 우리가 떠오른다.
그러다 이십 대 중반, 수나의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 가난 속에서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딸이라는 공통분모가 우리를 강력하게 묶어주었다. 우린 주기적으로 만나 세상에 대한 한탄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취한 채로 이태원 곳곳을 누비며 현실을 지웠다.
우리는 더없이 가까워졌다. 서로만이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서로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기준이나 윤리는 우리에게 무용했으며 어떤 일이든 서로의 편을 들었다.
결이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삼십 대에 들어서고부터였다. 수나는 오래 만나 권태로워진 연인과 결혼이라는 관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반대로 나는 결혼은 어려울지언정 난생처음 진지한 사랑에 임하고 있었다. 각자가 처한 환경이 어느 순간부터 달라지고 있었다.
샴쌍둥이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가까워지는 건 아무 수고도 들이지 않았는데, 멀어지는 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았다. 수나는 반려자와 결혼이란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중인 반면 나는 미래를 함께 하고픈 상대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의 공감대도 삶도 이미 달라졌고 앞으로도 더욱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뼈아프도록 어려웠다.
고질병인 회피가 심하게 도지며 한국 사회 자체를 떠나고 싶어졌다. 어떤 일이 닥쳐도 수나와 함께 조소를 지으며 현실을 씹어대며 버텼는데. 이제는 아무도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위로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족은 원래도 의지는 커녕 내게 짐이나 더 얹어주지 않으면 다행인 존재였고, 다른 친구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에는 내가 얼마나 염세적이고 진창인 인간인지 자세히 몰랐다.
해외로 이민하는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해외살이에 미련이 있었던 터라 결심이 어렵지는 않았다. 비슷한 인간들 사이 군중 속 고독보다,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이 백배는 나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의 외로움은 이상한 것이지만, 그곳에서는 당연한 것일 테니까. 내 탓이 아닌 척 타인과 환경을 원망하고 어쩔 수 없는 적막을 감내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나는 내가 떠날 준비를 한단 사실을 듣고 차분하게 응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함께 술을 마시던 날, 그는 떠나기 전까지 자신을 우리 가족과 자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자신이 우리 가족을 챙기려면 그전까지 많이 친해져 놓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그 말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조금 울었다. 그렇게 서서히 우리 사이의 거리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지금의 애인을 만나게 되었다. 만난 지 2개월 차에 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을 보러 가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흔쾌히 응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시험 겸 여행을 위해 방문했던 대만까지 동행하였다. 덕분에 시험은 합격했으나, 애인과 가까워지며 강렬했던 해외살이에 대한 욕구는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애인에게 나는 남들에게는 하기 어려운 말들도 편안히 털어놓을 수 있었고, 애인은 항상 담백한 반응과 함께 자연스레 나를 이해해 주었다. 건강한 사랑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나는 점차 사랑의 영원과 행복한 미래를 진심으로 그리게 되었다.
그제야 밑빠진 독처럼 내 안에 존재하던 공허함의 홀이 채워졌고, 고독감과 우울감 때문에 중독되어 있던 알코올을 끊고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약속들도 정리할 수 있었다. 애인은 내가 하고 싶다는 것들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존중해 주었다. 해보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을 내 성격을 아는 그는, 행여나 자신 때문에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언제든 도전하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현실적으로 결혼은 어려운 우리임에도 삶을 풍부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동반자를 만나 안정을 찾고 있었다. 적당히 열심히 일하다가 주말마다 만나 소소하고 건강한 여가를 누리는 별다를 일 없는 일상이 얼마나 빛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느끼게 됐다.
세상과 삶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내가 몸과 마음을 망치는 도파민들로 현실을 피해 일탈하는 동안, 수나는 내 손을 잡고 함께 달려주던 둘도 없는 동지였다. 그게 건강하지 않은 방식이었을지언정 함께였기에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서로가 있었기에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던 우리가 삶의 갈림길로 들어서며 잡고 있던 손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때 느껴지던 고통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낯설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과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순으로 서서히 가고 있다.
지금의 수나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나이 들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서로의 성장을 목도한 모든 관계들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눈물을 참으며 수나의 결혼식 축사에서 읽었던 것처럼, 우리 둘만이 공유했던 치열하고 찬란했던 시절은 이제 저 먼 기억 속에 묻혔다. 분명 가장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매 순간 형형색색 아름답게 칠해진 장면들로 남아있다. 나는 내게 그런 기억을 남겨준 수나를 생각하면 고맙고도 벅차면서도 미안한, 정말로 복합적인 심경이 된다.
앞으로도 우리가 각자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느슨하고도 너무 멀지는 않은 사이로 이렇게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