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을 배양한 계몽주의
과학적 물질주의나 기술적 특이점은 모두 완전한 지식에 의한 자유를 지향한다. 물론 21세기가 된 오늘날에도 완전한 지식은 우리 손에 없지만, 이것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특히 현대사회를 설계하고 창안했던 사람들 입장에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든 아니면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든 최선을 다해 지식을 발전시키려는 욕망을 가졌을 법하다. 과학혁명과 맞물려 등장한 계몽주의는, 이성적 사고에 대한 신뢰와 사회 진보에 대한 낙관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을 꿈꿨다. 사회 변혁에 도전한 사고방식 중 계몽주의만큼 성공한 경우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물론 계몽주의의 이러한 역동성은 과학혁명 덕분에 가능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계몽주의자의 노력엔 과학혁명과 비슷한 어려움에 봉착했다. 계몽주의를 주도했던 지식인은 또한 과학자였다. 퐁트넬, 모페르튀, 달랑베르, 콩도르세는 또한 수학자였다. 또 흄, 볼테르, 디드로, 루소 등은 다른 과학자와 주기적으로 소통했고, 철학자로 잘 알려진 칸트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일반 자연사와 천체이론〉을 썼다. 한 마디로 당시엔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그들의 노력은 자연스럽게 과학에서 사회나 도덕에 도움 될 만한 것을 뽑아내려 애쓰는 쪽으로 기울었다. 계몽주의자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데, 자연에 관한 지식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어떤 의미나 목적도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11) 의미나 목적이 없는 곳에 사회적 당위 또한 있을 수 없다. 또 계몽주의자는 과학혁명이 야기한 것과 동일한 논리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만약 완전한 세상에서 모든 사건이 예정대로 일어난다면, 거기서 굳이 사람만 예외로 인정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12)
이런 핵심적인 난관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자는 진보와 자유라는 현대사회의 핵심 이념을 전파하는데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진보의 가능성을 열어준 건 분명 과학혁명이었지만, 이 진보가 사람들 마음에 뿌리내리도록 물과 양분을 공급한 건 계몽주의였다. 계몽주의자는 우리가 진보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삶은 더 풍요로워지며 세상은 더 개선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앞서 살펴봤다시피 과학혁명은 사람의 자유를 제약하였고, 계몽주의자는 어떤 답을 내놓아야 했다. 사람들은 자유 없는 삶을 진보라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에 관하여 가장 선명한 태도를 견지했다.
칸트는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도덕 원칙을 남겼다. 그가 이렇게 말한 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모든 사람이 타고난 이성을 온전히 행사하기 위해선 반드시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고, 세상은 그런 사람을 위해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사람은 자유를 제약하는 상황이 해소되기만 한다면, 충분히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 또 칸트에게 있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건, 존중받아 마땅함과 동시에 그에 따른 책임도 따른다는 걸 의미했다. 말하자면 자유는 그의 도덕 원칙을 떠받치는 토대였다.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론에 대응하여, 그는 이것을 부정하는 선택을 한다. 칸트의 선택에 관해 이사야 벌린이 한 말을 들어보자.
“(…) 만약 생명 없는 자연에 의심의 여지없이 참되게 적용되는 이른바 인과율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도 마찬가지로 참되게 적용된다고 하면, 실제로 세상에는 도덕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 인간은 전적으로 외적 요인에 좌우될 것이며, 비록 자기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게끔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실상 결정되어 있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칸트에게 결정론, 특히 기계적 결정론은 어떤 자유나 어떤 도덕과도 양립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반드시 거짓이어야 한다. 그가 의미한 결정론이란 외부 요인에 의한 모든 형태의 결정론이다. (…)”(14)
칸트는 선택의 기로에서 자유의 편에 섰으며, 이 말은 곧 사람만 예외적으로 결정론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 가장 타협하지 않는 계몽주의자였다. 물론 다른 계몽주의자는 칸트처럼 자유를 고집스럽게 내세우진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을 극복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사람이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이성을 갖췄고, 이 능력이 사람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애매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또 그들은 과학기술 발전에 가장 열광적이었지만, 한편으로 이 세상에 자유를 실현하는 데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몽주의자는 세상과 사람들 마음에 완전한 지식에 의한 자유가 자리잡는 데 헌신했다. 그들은 이 신념에 따를 때 내 삶이 개선되고 세상이 진보한다고 사람들에게 선전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신념에 기여하도록 선동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살찌우고 습득할수록 사회가 진보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드니 디드로가 왜 그토록 고생하여 《백과전서》를 완성했겠는가? 각계각층의 지식인이 참여한 이 방대한 책은, 사람들이 지적 소양을 갖췄을 때 발전과 진보가 가능하리란 믿음이 담긴 그야말로 계몽주의의 상징과 같은 물건이다.(15) 그를 포함한 백과전서 집필자들은 당시로선 가장 앞선 지식을 담으려 노력했다. 과학혁명은 완전한 지식에 의한 자유란 신념이 자랄 토양을 만들었으며, 계몽주의는 토양에 심어진 신념을 싹 틔우고 키워내는 데 전력했다. 하지만 지식인이 그럭저럭 모순을 덮어둔 채 사용한 이 신념은, 현대문명으로 하여금 해결할 수 없는 체제적 한계에 봉착하게끔 만들었다. 그 한계는, 자본주의 때문에 선명해졌다.
11. 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양유성 옮김, 글항아리, 2011, 21쪽. “(…) 이 법칙들은 현상들의 질서 잡힌 관계를 밝혀내고 그것들을 하나의 규칙 아래 두었다. 법칙들이 존재하는 것은 밝혀냈으나 당위는 밝혀내지 못했다. (…) 그러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가져오려 했다. 이들은 자연과 이성의 법칙에 도덕적 명령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객관적 도덕과학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암묵적으로 모순되는 듯했다.”
12. 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양유성 옮김, 글항아리, 2011, 21-22쪽. “(…) 그들의 목적은 자연의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서 미래의 사건들을 거의 정확하고 완전하게 예측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자연에서 더욱 위대한 결정론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적용된 자연법칙은 특히 자의적인 인간의 권위에서 벗어난 좀 더 위대한 자유로 여겨졌다. (…) 그렇지만 자연법칙이 물리적 세계의 사건을 완전하게 결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은 쉽게 해결될 수 없었고,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에서 덕이나 삶의 규칙을 발견하려고 하는 한 계몽철학은 긴장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13. 이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도서출판 길, 2020, 28-31쪽.
14.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석기용 옮김, 필로소픽, 2021, 147-148쪽.
15. 브리태니커 편찬위원회, 《근대의 탄생》, 이정인 옮김, 아고라, 2017, 175쪽. “(…) 《백과전서》는 ‘합리적 사건’으로서 모든 예술과 학문의 본질적 원리와 응용을 나타냈다. 《백과전서》의 바탕에 있는 철학은 합리주의와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조건부적인 믿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