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선 앎
지구는 약 1만 2천 년 전부터 홀로세라는 매우 안정된 기후에 들어섰다. 이후 해수면은 점차적으로 상승해, 약 7천 년 전에 지금과 비슷한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안정된 해안선을 바탕으로 문명은 생겨나기 시작했다.(8) 커다란 강 하구에 있는 범람원에 생겨난 도시에선 기술이 발달하고 교역이 이뤄졌으며, 인구가 늘어나고 계층이 형성되었다. 안정된 해안선을 따라 생겨난 문명 중 하나가 수메르다.
수메르 문명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남부 대평야를 발판 삼아 오우에일리, 에리두, 우바이드 그리고 우루크 같은 도시에서 출발했다. 두 강이 만드는 풍요로운 평야엔 점차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때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경작지가 한계에 봉착했지만, 다행히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속속 발명되었다. 쟁기, 짐수레 바퀴, 범선, 청동기 그리고 물레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9) 그러나 가장 유명한 수메르의 발명품을 꼽자면 역시 쐐기문자를 빼놓을 수 없다.
발명이 흔히 그렇듯, 쐐기문자도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유프라테스 강 북부에선 사람들이 조약돌에 여러 기호를 새겨 거래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남부 사람들은 조약돌이 아닌 점토를 이용했다.(10) 직선을 조합하여 만드는 단순한 기호는 시간이 지나 수메르 상형문자로 변하였다. 이것은 신분이나 지위를 표시하는 원통 인장이나 더 많은 기호를 써넣을 수 있는 점토판에 사용되었다. 경제 활동이 늘어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신용을 요구하였고, 상형문자는 작성 속도나 방식에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엔 점토판 위에 상형문자를 갈대 첨필로 새겼는데, 이것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수메르인은 세로 쓰기를 가로 쓰기로 바꿨으며, 글자를 새기지 않고 찍어 눌렀다. 그렇게 5,500년 전 즈음하여 쐐기문자가 탄생했다.(11)
초기에 쐐기문자는 도시 행정을 관리하거나 경제 활동을 보장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자는 다양한 곳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수메르인은 자신이 겪었던 느낌이나 감정을 간략한 서술부터 장대한 서사까지 쐐기문자로 아낌없이 써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했다거나 누가 누군가와 사랑했다와 같은 내밀한 이야기부터 왕이 자신의 승리를 포고했다거나 신들에게 찬송을 바쳤다와 같은 널리 알리고 싶은 이야기까지 수많은 작품이 점토판에 담겼다.(12) 이런 수메르인의 활발한 창작 활동 덕분에, ‘길가메쉬 서사시’가 몰락과 멸망의 오랜 세월을 뚫고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이 서사시엔 현대인도 비껴갈 수 없는 죽음과, 죽음을 둘러싼 운명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길가메쉬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었고, 왕이 흔히 그렇듯 그는 꽤나 오만방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무도함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신들은 본보기를 보이고자 그의 친구 엔키두를 죽였다. 그의 마음엔 슬픔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는 죽음을 피하고자 여행을 떠났고, 자신의 조상이자 영생자인 우트나피쉬팀을 만날 수 있었다.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 저의 친구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저와 함께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살았던 엔키두였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그에게 덮쳤습니다. 6일 낮, 7일 밤 그를 위해 애도했습니다. (…) 사랑했던 저의 친구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 저도 그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누워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못하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13)
다행히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생하는 방법을 배웠다. 6일 낮, 7일 밤 동안 깨어 있어야 했건만,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고대하던 영생을 얻지 못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우트나피쉬팀의 아내는 그에게 젊음의 가시를 주었으나, 이마저도 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운명을 받아들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즐겁게 살다 죽었다.
이 작품은 어쩌면 신화와 문명의 경계에 살았던 수메르인의 정체성을 드러냈던 것인지 모른다. 우선 길가메쉬는 신과 사람의 피가 섞여있다.(14) 이것은 신화와 문명을 함께 누렸던 수메르인을 상징했던 게 아닐까. 또 그의 이름에도 신화적인 교훈과 문명적인 열정, 말하자면 사람의 한계와 가능성이 뒤섞여 있다. 길가메쉬란 이름은 늙은이를 뜻하는 ‘빌가’와 젊은이를 뜻하는 ‘메쉬’가 합쳐져 만들어졌다.(15) 즉 이 작품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여기에 저항하고자 했던 수메르인의 열망이 담겼던 것이다. 이 열망 덕분에 앎은 문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수메르인은 쐐기문자를 사용하여 점토판에 담았던 덕분에 자신의 이야기를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비록 길가메쉬를 포함한 수많은 수메르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지만, 필경사가 찍어 눌러 만든 길가메쉬 서사시와 수많은 점토판은 기어코 살아남았다. 수메르 이후에 등장한 문명이나 사람들도 죽음이나 몰락을 면치 못하지만, 그들이 일군 앎은 다음 세대 혹은 문명에 영감을 줬다. 그렇게 앎은 여러 문명에 걸쳐 영향력을 늘려왔으며, 최전선에 현대문명과 현대인이 우뚝 섰다.
8. 조천호, 《파란하늘 빨간지구》, 동아시아, 2019, 인류 문명은 안정된 기후에 의존하고 있다.
9.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21, 49쪽. “남부인은 쟁기, 짐수레 바퀴, 범선(돛단배), 청동기, 물레를 발명했다. 한계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출발점이었다. 농산물 생산량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밥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수레나 배의 운송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무역과 통상은 확대일로에 놓여 있었다. 청동제품이 넘쳐났고 밥그릇도 남아돌았다. 이제는 정말 살 만한 세상이었다. (…)”
10.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21, 55-56쪽. “1만 년 전 사람들은 물표(物票)를 만들어냈다. 북부에서 삼각형, 원형, 원뿔형, 원반형의 물표가 등장했다. (…) 돌이 없는 남부에서는 점토로 만든 물표가 등장했다. (…) 물표 없이 신전의 행정이나 회계를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 (…)”
11.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21, 62쪽. “(…) 그들은 글자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90도 돌려 점토판에 적기 시작했는데 글자 쓰기가 훨씬 편했다. 글 쓰는 법도 바뀌어 ‘위에서 아래로 쓰기’ 대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다. 또한 갈대 첨필로 그리는 것이 아닌 찍어 누르기를 택했다. 문자 모양은 쐐기[楔]꼴로 변해갔다. 상형문자는 설형문자로 바뀌었다.”
12.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선사문화》, 이희준 옮김, 사회평론, 2000, 252쪽. “(…) 왕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포고하는 데 문자판을 이용했다.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일꾼인 아들들을 훈계하고, 법률가들은 복잡한 거래 관계를 기록했다. 수메르 문학에는 대서사시, 사랑 이야기, 신들에 대한 찬송, 그리고 비극적 영탄 등이 들어 있다.”
13.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20, 285-287쪽.
14.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20, 70쪽. “(…) 3분의 2는 신이었고 3분의 1은 인간이어서 그의 형체는 어느 누구와도 같을 수 없었다. (…)”
15.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20, 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