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 편향
낙관 편향은 이전 세상에선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과거엔 내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란 기대를 가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이 모든 비관을 뒤엎어버릴 혁신을 창안하였고, 세상은 낙관주의자에게 우호적인 환경으로 바뀌었다. 이제 재능이 출중한 과학자나 역량이 충분한 기업인이 갱신하는 앎에 올라타 낙관주의자로 활보한다. 그들은 자신이 연구한 과학 이론이나 개발한 기술 제품으로 현실에 널린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것이라 떠들어댄다. 또 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살기에 좋은 세상으로 만들 것이란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낙관주의 역시 편향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이 말은 곧 그들이 내놓은 판단이 세상을 얼마든지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징후는 여기저기 넘쳐 난다. 벌어지는 빈부격차, 늘어나는 쓰레기 그리고 지구 순환을 뒤엎는 기후변화까지. 물론 낙관주의자는 발전하는 과학기술로 얼마든지 현대문명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면 문제는 현대문명에서 나왔을지 몰라도, 해결은 현대인으로서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파국은 분명 도래할 것이다.
매트 리들리는 이대로 가다간 상황이 매우 악화되리라는 데엔 동의하지만, 인류 진보와 문화 진화가 계속된다면 세상은 더욱 나아질 것이라 주장한다.(21) 물론 과학자나 기업인을 비롯한 여러 낙관주의자는 그들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확실성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왜냐면 낙관주의 역시 확증 편향이나 가용성 휴리스틱 그리고 비관주의처럼 하나의 편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낙관주의자가 기대하는 것처럼, 세상이 계속해서 나아질 거라 기대하는 건 편향에 빠진 위험한 선택이다.
우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졌다. 갱신하는 앎이 오히려 삶을 괴롭게 만드는 상황 말이다. 어쩌면 이 앎이 우리 삶에 새로운 부조리로 자리잡은 것 아닐까. 부조리의 깊은 골짜기가, 앎을 갱신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생겨났다. 너무나 생소한 이 부조리 앞에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껏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부조리와도 계속해서 대결해온 사람들이, 체제에서 생겨한 낯선 부조리를 어쩌지 못한다는 건 꽤나 이상한 일이다.
21. 매트 리들리, 《이성적 낙관주의자》,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0, 421쪽. “(…) 비관주의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타당한 주장이다. ‘만일 세계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모든 인류가 재앙을 맞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만일 모든 수송수단이 석유에 의존하고 석유가 고갈된다면, 수송은 중단될 것이다.’ ‘만일 농업이 앞으로도 계속 관개에 의존하고 대수층이 고갈된다면, 기아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조건에 주목하라. ‘만일……’ 세계는 지금과 똑같은 상태로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인류 진보의 핵심이자 문화 진화가 보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며, 역동적 변화의 가장 큰 취지이고,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진정한 위험은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데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