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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호철 Aug 05. 2024

세상을 다시 보기 (1)

바다와 파도

세상엔 한 때 솟아오른 산과 야트막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산에 머물거나 들판을 돌아다녔다. 멀리서 봤을 때 산과 들판은 꽤나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산 정상엔 누구도 침범치 못할 성이 있었고, 들판엔 갖가지 돌이 널브러져 있었다. 산세는 올라가기엔 가팔랐으며, 들판에 돌은 다니기에 버거울 만큼 여러 모양으로 뾰족했다. 또 성 안에 사는 상층민은 매일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는 반면, 들판 위에 하층민은 돌에 다치지 않으려 애쓰느라 즐겁긴커녕 슬퍼할 틈도 없었다. 이곳에서 삶의 모습은 해발 고도만큼 달라 보였다. 이런 세상에 언제부턴가 파도가 들이치더니,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산과 들판은 모두 잠겨버렸다. 


출렁대는 바다와 몰아치는 파도로 변모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두 해수면에 떠다니게 되었다. 산과 들판을 돌아다녔던 사람들은 이제 바다를 헤엄친다. 새롭게 바뀐 세상에서 넓고 깊은 물결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멀리까지 뻗은 수평선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저기서 밀어닥치는 파도가 사람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사람들은 파도에 삼켜지지 않으려 안간힘 썼고, 심해로 익사하지 않으려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 확연히 달라진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단단한 지면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특권층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바다나 파도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한다. 바다에 떠있으려 계속 헤엄쳤지만, 파도가 머리 위로 쏟아져 숨쉬기가 곤란했다. 물살이 빠르게 부딪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벅찼다.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파도에 준비된 특권층은 파도에 유유히 올라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 서핑보드와 서핑복 그리고 구명조끼까지 모두 갖춰 파도가 무섭긴커녕 즐거워 보였다. 만약 우리가 하늘에서 이 둘을 내려다본다면, 너무나 다른 삶의 모습에 바다가 어떤 곳인지 명확히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사람들 중 한 명인지라,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 바다와 파도는 곧 현대사회와 현대문명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삶을 영위한다. 현대사회에서 삶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띤다. 우선 사람들 간에 거리가 없어져 한 곳에서 일어난 사소한 변동이 곧장 지구 반대편에 영향 끼친다. 또 온갖 문제에 대한 해결이 어느 때보다 수월해져 이로 인한 변화나 혁신이 빈번하다. 마지막으로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낙관적 기대가 매우 높다. 이런 정황만 봤을 때 현대사회는 희망으로 가득 찬 것만 같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도 재화는 여전히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중이며, 그 과정이 더 정교하고 치밀해진 것 같다. 나머지는 없는 돈으로 생계를 이으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반면, 특권층은 막대한 재산으로 온갖 혜택을 누리며 즐거워한다. 또 종교나 민족 그리고 자원을 빌미로 분쟁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저개발 국가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인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졌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현대사회와 현대문명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우리가 세상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미래를 낙관하는 여러 선전에도 불구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사회처럼 거의 모든 것이 연결된 고도로 복잡한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우리는 늘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현대사회라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곳에서 매 해, 매 달 그리고 매일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로 불안감에 시달리며 사는 중이다. 이런 험난한 곳을 무사히 살아내기 위해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세상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고, 그 경로는 무슨 사고방식에 의해 설계되었는지에 관한 핵심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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