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와 단절
이 글을 읽기에 앞서, 여기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건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오는 주요 사상이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임을 유념해 주기 바란다.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생 혼자 살아라!'이다. 이 견해는 일견 타당하다. 우리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내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누가 죽으라고 죽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다만 그가 인생론을 주장하며 고독을 강조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그는 혼자 산책하고, 밥 먹고, 연극 보고, 잠들었다. 거의 모든 생활을 혼자서 해결했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철학 강사를 포기하고 몇십 년을 책 쓰고 사색하며 살았다. 한 마디로 백수였다. 이런 생황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쇼펜하우어에겐 유능한 기업인이었던 아버지가 있었는데, 이런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그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덕분에 그는 직업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을 마음껏 써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가 철학의 길로 들어서는 걸 반대했지만, 역설적으로 아버지 덕분에 그는 철학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의 고독은 주변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자신감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는 굳이 세상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다. 왜? 돈이 있으니까.
그의 인생론은 설사 요즘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지라도, 실상은 반쪽 짜리에 가깝다. 현대사회처럼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그가 말한 고독이 마치 도파민을 끊어내는 적절한 수단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가 말한 고독은 '절제'라기 보단 '단절'에 가깝다.
그는 돈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굳이 소통하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었고, 마침 철학이란 게 혼자서 해내기에 수월한 학문이었다. 현대사회에서 돈만 있다면 뭘 해도 즐겁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생계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상으로 튀어나와야 한다. 그뿐이다.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은 그가 지녔던 삶의 태도와도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사람이 지키기 어려운 고독을 사람들에게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은 고독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대다수 사람들에게 고독은 고통이지만, 그에겐 행복이거나 적어도 안락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일 기꺼이 감내하라고 말할 작정이었다면, 고독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어야 했다. 그것이 그에겐 고통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전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의 의지를 긍정했다. 그는 머리맡엔 총을 두고 잠들었으며, 시위대를 잘 관찰할 수 있도록 경찰에게 자신의 방을 빌려줬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은, 자신에겐 매우 잘 맞는 옷이었을지 모르나 사람들이 입으려면 여러 번 수선을 거쳐야 하는 맞춤복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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