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만두, 춘권, 월병의 유래
만주족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보보', 보보는 밀이나 잡곡 가루로 만든 뎬신(경식, 간식류)이다. 만주족은 '보보'를 잘 만들어서 '만점한채'라는 말도 있다. 만주족의 뎬신은 연회 메뉴의 중심이 되었고 청나라의 제사나 여러 정치의 장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주보보'는 물만두를 가리키는데 오랜 역사를 가지는 만두는 만주족에게도 중요한 주식이 되었다. 궁중에서는 누르하치 대부터 섣달그믐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소함' 만두를 먹어 죽은 이를 모셨으며 이것이 선조의 유훈이 되어 계속 이어졌다. 특히,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행한 청조 말기에는 섣달 그믐에 궁중의 많은 사람을 모아 만두를 빚어 정월 초하루에 다 함께 먹으며 신의 가호와 선조의 비호에 감사를 올렸다.
또한 춘권은 진나라 사람 주처의 '풍토기'에 등장하는 '오신반'(매운맛의 봄 채소 다섯 종을 둥그렇게 한데 담은 것)이 원형으로 당대에는 '춘반'이라 불리고 송대 이후에는 '춘병'으로도 불렸는데, 입춘 무렵에 봄이 찾아오는 것을 감축하며 먹는 음식이었다. 춘권은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실은 뿌리가 꽤 깊은 음식으로 1~2세기 후한 무렵부터 먹은 것으로 보니 역사가 최소 2000년쯤 된다. 이 무렵의 일 년 중 행사를 노래한 『사민월령』에 입춘이 되면 새로 돋아난 채소를 먹으며 봄이 온 것을 축하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춘권의 시작은 그러니까 봄 채소였다. 그러다 400~500년 쯤 후, 6세기 문헌인 『형초세시기』에 입춘이면 파와 마늘, 부추와 달래, 그리고 인도가 원산지인 흥거라는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쟁반에 담아 먹는 풍습이 소개된다. 그래서 이름을 다섯 매운 채소라는 뜻의 오신채(五辛菜) 혹은 오신채를 쟁반에 담았다는 의미에서 오신반(五辛盤)이라고 불렀다. 예전 봄이면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들판에서 봄나물 캐듯 중국에서도 봄채소를 뜯어 먹다 이 무렵부터는 값비싼 향신 채소를 쟁반에 담아 먹었으니 봄채소 먹기가 상류층의 입춘 행사로 형식화, 고급화된 것이다. 입춘 오신채는 이후 한반도에서도 조선시대를 넘어 근대까지 봄철 풍속으로 자리잡았고 일본에서는 살짝 변형돼 입춘 대신 1월 7일 인일(人日)에 일곱 가지 봄채소로 칠초죽(七草粥)을 끓였다. 입춘 풍속이 동북아 전체로 퍼진 셈이다. 어쨌거나 송나라 이전까지 입춘 오신채는 쟁반에 담아 먹는 봄채소였을 뿐 밀전병에 말지는 않았으니 아직 춘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송시대를 거치며 입춘 봄채소가 요리로 변신하는데, 바뀌기에 앞서 먼저 어마어마하게 고급화된다. 이 무렵 상류사회에서는 입춘 무렵 쟁반에 봄채소와 함께 과일, 엿 등을 담아 돌리는 풍습이 유행했다. 이를 봄 쟁반, 춘반(春盤)이라고 불렀다. 이 춘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무림구사에는 “입춘이면 궁궐 후원에서 정교하게 춘반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눠주는데 그 값이 일만 냥을 넘는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다 송나라 때 쟁반 대신 밀전병에 봄채소를 싸먹는 풍습이 생겼다. 밀전병의 등장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밀전병에 싼 춘권은 그만큼 고급요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원나라 때 요리책인 『거가필용』에 지금처럼 튀긴 춘권이 처음 보인다. 지금은 튀김요리가 별 것 아니지만 기름이 귀했던 옛날, 튀김은 경제적 풍요를 상징했다. 원나라에서 춘권이 또 한 차례 업그레이드 됐다. 상류사회의 입춘 고급요리였던 춘권이 대중적으로 퍼진 것은 청나라 무렵이다. 청나라 수도인 연경, 지금 베이징의 풍습을 기록한 『연경세시기』에 봄이 되면 부녀자들이 밀전병에 채소를 싸서 깨물어 먹는 풍습이 있다고 했는데 가진 자나 없는 자 모두 춘권을 먹는다고 했다. 청조 궁정은 이 관습을 받아들여 특히 건륭제 시대부터 입춘 전날 등벵이산 동식물 재료를 고루 넣은 '춘병'을 먹었다. 이렇듯 춘권은 청조의 궁정 요리로 채용되자 만주족의 색채가 짙어졌다.
월병은 당나라 이세민(태종) 시대에 토번(티베트의 통일 왕조)의 상인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송대 무렵부터 중추절에 월병을 먹는 일이 널리 행해졌으며, 명대에는 다양한 소를 넣은 월병을 만들었다. 청나라 궁정에서도 다양한 월병을 먹었으며 특히 중추절을 설 다음으로 중요한 명절로 여겨 월병을 올려 제사를 지냈다.
『낙중견문』이라는 문헌에 당 희종이 그 해의 과거 급제자인 진사들에게 지금의 월병과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월병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당나라 때 황실에서 만들었던 고급 떡(빵)으로 궁궐 떡이라는 뜻에서 궁병(宮餠)으로 부르다 12세기 이전 북송 무렵에는 민간에 전해지면서 작은 떡이라는 뜻의 소병(小餠)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한다. 북송 때까지 월병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다. 그러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소병을 먹으며 마치 달을 씹는 것과 같은 맛이라고 노래한데다 북송 때 중추절이 명절로 되면서 떠오른 보름달을 감상하며 먹는 떡, 그리고 둥근 모습이 마치 보름달을 닮았다는 뜻에서 달떡, 다시 말해 월병(月餠)이 됐다.
실제로 문헌에서 월병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것은 남송 때인 13세기 말이다. 이 무렵 문헌인 『무림구사』에 월병이 보이고 비슷한 시기에 남송의 수도로 지금의 절강성 항주의 풍속을 적은 『몽양록』에도 나온다. 그렇기에 남송 무렵에 월병이라는 음식 이름이 굳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14세기 후반 원말명초에 중추절과 월병이 명절과 명절음식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명절로서 중국의 중추절은 특히 역사가 짧다. 먼저 중국 중추절은 달 숭배신앙과 추수감사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정착된 것으로 본다. 물론 고대에도 달 숭배 의식은 있었지만 명절로 쇠기 시작한 것은 대략 12세기 북송 때다. 북송의 수도 개봉의 풍속을 적은 『동경몽화록』에 비로소 보인다. 중추절이면 시장에 새로운 곡식과 과일이 나오고 사람들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달구경을 한다고 기록했다.
이후에는 중추절 관련 기록이 많지만 그 이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5~7세기 중원의 풍속서인 『형초세시기』나 송나라 초인 10세기 말의 『태평어람』에도 다른 명절은 있지만 중추절은 나오지 않는다. 당나라 때 일본 승려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지금의 산동성에서 있었던 음력 8월 15일의 행사를 “다른 나라에는 없고 신라에만 있다”고 했으니 당나라에는 중추절 풍속이 없었던 것 같다.
한편 중국의 중추절 월병 선물 풍속에도 나름의 배경이 있다. 월병의 기원은 당나라때 서역에서 전해진 고급 식품으로 보는데 단순히 먹는 것 이상의 하사품 내지 답례품으로 선물할 가치가 있다. 덧붙여 둥근 모양의 월병은 둥글 단(團) 둥글 원(圓)자를 써서 중국에서 화합과 단합을 뜻하는 단원(團圓)의 상징이다. 춘절에 가족이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화합을 다지는 단원반(團圓飯)과 비슷한 의미가 있다.
출처: 중국요리세계사, 윤덕노의 식탁 위의 중국
이범준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교수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