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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린 Jul 12. 2024

도배하는 날

얼룩진 마음을 뜯어내자 비로소 애정이 보이더라

우리 집이 지어진 지 10년. 그동안 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느새 취업까지 했다. 세월은 나만 먹은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더라. 갑자기 배관이 터지고, 예전엔 보지 못한 얼룩이 벽을 잠식한 것을 보며 나만 늙은게 아니더라 싶었다. 얼룩에 이어 벽지에 곰팡이까지 슬자 결국 우리 가족은 10년 만에 도배를 결심했다.


1, 2층 전체 내부 벽지를 전부 갈아치우는데 100만 원.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했다.


7시 30분. 평소 기상 시간보다 30분 이른 아침,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는 모든 가구를 벽으로부터 띄워놓고 있었고 도배업체 아저씨들은 하나 둘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래된 벽지를 모두 뜯고 새로 벽지를 도배하는 날. 날짜를 까먹거나 헷갈린 건 아니지만 괜히 잠을 깨웠단 사실에 짜증이 났다. 다행히 28살 나이 먹고 엄마한테 투정을 부리지도, 기껏 부른 도배기사님을 돌려보내지도 않았다. 장하다. 벽지가 얼룩진 10년 동안 일어나 짜증을 누르고 가구 옮길 정도의 사회성은 길렀구나. 다음 도배할 때 즈음엔 더 나아져 있겠지... 나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기사님은 숙련된 솜씨로 자질을 시작했고 곳곳에 있던 벽지를 무심한 듯 바닥에 뜯어 던졌다. 작업 장비와 벽지, 정리 안된 짐이 가득한 집에 고양이까지 뛰어다니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도저히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던 나와 엄마는 9시 수영 및 환자 보호 명목으로 서둘러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4시가 다되어 울리는 휴대폰. 저녁 약속이 있어 근처 역에 데려다 달라는 아빠의 전화였다. 연락을 받고 돌아온 집 바닥엔 오래된 벽지와 쓰레기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했고 우리집 고양이는 밖에서 참새를 물어와 자랑하고 있다. 도배업체분들이 다 정리하고 가시겠지... 나는 아빠를 역에 데려다주고 그나마 정리된 2층 안방에 누웠다. 유튜브를 보며 작업이 끝나길 기다리려 하는데 계단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기사님들 해지기 전에 돌아가셔야 한다며 쪼그려 앉은 채 허리를 굽혀 종이 조각을 쓰레기봉투에 담는 엄마. 아픈데 안 쉬고 뭐하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엄마가 일하는데 가만히 누워 휴대폰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 일어나 묵묵히 청소를 시작했다. 큰 벽지를 먼저 다 주워 담은 다음, 자잘한 자투리 벽지, 쓰레기를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벽지 제단 작업 중 부러진 커터칼 칼날들이 바닥 곳곳에 눌어붙어 물티슈로 풀자국을 없앴다. 초여름, 30분가량 땀을 닦으며 작업을 하다 보니 생각이 땀과 함께 쏟아졌다. 


엄마에게 이 장소는 어떤 곳이었을까. 완벽하진 않지만 직접 지은 집.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 곳이었다. 난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며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시간이 줄었고 애정이 자연스레 식어갔다. 마음 편히 쉬는 곳이라기보다 엄마 아빠를 보기 위해 잠시 머무는 숙소 같은 느낌. 어느새 원인 모를 알레르기 반응과 함께 내 마음과 멀어졌나 보다. 


눕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집을 청소하기 시작한 엄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였을까? 직접 한 칸 한 칸 계단을 닦다 보니  부러진 칼날만큼이나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내 집이니까. 내 집이니 직접 꼼꼼하게 닦고, 내 집이니 책임져 주실 도배기사님께 시원한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준다. 귀찮았던 마음은 내 마음속 얼룩이었고 난 세월을 핑계 삼아 보지 못했다.



깨끗해진 벽지를 바라보니 마음이 후련하다.

이제야 소중한 추억 하나를 쌓았구나.


다음 도배를 할 때쯤엔 더 나아져 있을 나를 기대하며, 



도배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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