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영어를 꼭 배워야 하나?

번역 앱 하나면 어디서든 밥을 시킬 수 있는 시대

by kimdonglin

번역기가 완벽해진 세계

휴대폰을 꺼내 말을 하면 화면에 외국어가 뜬다. 식당에서 메뉴를 카메라로 비추면 한국어로 바뀐다. 회의에서 실시간 자막이 뜨고, 논문을 넣으면 전체가 번역되어 나온다. AI 번역 시장은 2023년 21.7억 달러에서 2030년에는 57.2억 달러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최신 AI 모델은 일부 영역에서 전문 번역가에 근접하는 품질을 보여준다.


그러니 질문이 나온다. 영어를 왜 배워야 하나? AI가 다 해주는데.



맞는 말이다. 정보 전달은 이미 충분하다. 메뉴를 읽고, 길을 묻고, 이메일을 쓰는 데 영어를 직접 할 필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영어를 배우는 대신 도메인 전문성을 올리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번역기가 옮기지 못하는 것이 있다.



번역기가 건너지 못하는 강

2017년, 팔레스타인의 한 건설 노동자가 페이스북에 불도저 앞에서 커피를 든 사진과 함께 아랍어로 "좋은 아침"이라고 썼다. 페이스북 AI가 이것을 히브리어로 "그들을 공격하라"로 번역했다. 그는 체포됐다. 번역기가 단어를 옮겼지만, 맥락은 옮기지 못한 것이다.



영어 단어 'fair'를 보자. 번역기는 '공정한'이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이 단어 안에는 날씨가 fair하다, 피부가 fair하다, 가격이 fair하다 — 전혀 다른 맥락이 하나의 단어 안에 들어 있다. 왜 영어에서 '아름다움'과 '공정함'이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지는 번역기가 알려주지 않는다.



한국어의 '정'을 영어로 번역하면 affection이 나온다. 하지만 affection은 정이 아니다. 정은 시간이 쌓여야 생기는 것이고, 원수 사이에도 드는 것이고, 떠나면서도 남는 것이다. 일본어의 '空気를 읽는다(쿠우키를 요무)'를 영어로 하면 read the room이 되지만, 거기에 담긴 집단 안의 무언의 압력과 조율의 문화는 빠져나간다. 덴마크어 hygge는 coziness로 번역되지만, 그것은 물리적 아늑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관계의 질을 가리킨다. 번역기는 단어를 보여주지만 단어 뒤에 접혀 있는 삶의 태도는 보여주지 않는다.

단어와 의미 사이에는 번역기가 건너지 못하는 강이 있다.



언어라는 압축 파일

영어에는 deadline이라는 단어가 있다. 마감이라는 뜻이다. 흔한 단어다.

이 단어의 유래를 따라가면 1864년 미국 남북전쟁의 앤더슨빌 포로수용소에 닿는다. 수용소 울타리 안쪽에 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을 넘으면 사살당했다. Dead line. 죽음의 선이었다. 이 단어는 1920년대에 미국 신문업계에서 '원고 마감 시간'이라는 뜻으로 부활했고, 지금은 프로젝트 일정을 이야기할 때 가볍게 쓴다.



한 단어 안에 전쟁, 언론, 노동 문화가 들어 있다. 번역기는 deadline을 '마감'이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왜 영어권 사람들이 마감을 이야기할 때 은연중에 '넘으면 안 되는 선'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영어의 they, them, their는 원래 영어에 없던 단어였다.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 바이킹이 잉글랜드에 정착하면서 고대 노르드어가 스며들었고, 기존 대명사와 공존하다가 결국 자리를 차지했다. 영어를 배우면서 they라고 말할 때, 우리는 천 년 전 바이킹의 흔적을 입에 올리고 있는 셈이다.



sky라는 단어도 그렇다. 원래 고대 노르드어로 '구름'을 뜻했다. 바이킹과 함께 잉글랜드에 들어온 이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이라는 의미까지 품게 됐다. 지금 영어로 "하늘을 본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천 년 전에 '구름'이었던 외래어를 입에 올리고 있는 셈이다.



beef와 cow가 같은 동물을 가리키면서 왜 다른 단어인지를 알면 1066년 노르만 정복이 보인다. 살아 있는 동물은 앵글로색슨 농민의 말(cow, pig, sheep)이고, 식탁 위의 고기는 프랑스어를 쓰는 노르만 귀족의 말(beef, pork, mutton)이다. 어휘 하나에 계급 구조가 새겨져 있다. 농민은 기르고, 귀족은 먹었다. 그 거리가 단어에 남았다.




언어는 문화의 압축 파일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그 민족의 역사, 기후, 지형, 삶의 태도가 접혀 들어가 있다. 번역기는 파일명을 보여준다. 하지만 압축을 풀어서 내용물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언어학자 레라 보로딧스키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러시아어에는 연한 파랑(goluboy)과 진한 파랑(siniy)이 문법적으로 구분된다. 영어에는 blue 하나뿐이다. 실험 결과, 러시아어 화자는 두 범주 경계에 있는 파란색을 영어 화자보다 유의미하게 빠르게 구별했다. 언어가 만들어놓은 칸이 지각 자체를 바꾼 것이다.

지각만 바꾸는 게 아니다. 판단도 바꾼다. 시카고대 연구팀은 외국어로 사고하면 손실 회피와 프레이밍 효과가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국어에서는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외국어에서는 한 박자 거리가 생긴다. 그 거리만큼 판단이 달라진다.


언어는 세상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거르는 필터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다른 필터를 장착한다는 뜻이다. 같은 파란 하늘을 보면서도 읽어내는 것이 달라진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다. 축을 하나 세우는 것이다. 그 축이라는 감각을 처음 느낀 건 여행에서였다.



차원이 하나 늘어나면

전에 쓴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같은 도시를 여행한다고 하자. 축이 하나인 사람은 맛집을 찾고 사진을 찍는다. 역사라는 축이 있는 사람은 거리 이름에서 과거를 읽는다. 축의 수가 다를 뿐이다." 축이 많을수록 같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낸다.


언어도 같다. 영어라는 축이 없으면 deadline은 그냥 마감이다. 영어라는 축이 있으면 그 단어 뒤에 접힌 전쟁과 언론과 노동의 역사가 펼쳐진다. 같은 단어인데 보이는 것이 다르다.



북유럽을 여행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자 차가 멈췄다. 신호등이 아니라 사람이 서 있으니까 멈춘 것이었다. 운전자는 손짓까지 했다. 먼저 건너라고. 서울이었다면 경적이 울렸을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고 2,400년 전 로마의 도로법까지 추적한 적이 있다. 유럽에서는 사람이 2,400년 먼저 도로에 있었고, 한국에서는 차와 사람이 거의 동시에 도로에 나왔다. 도로 하나를 놓고도 역사와 문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복지 구조를 검색하다 보니 교육이 보였고, 교육을 따라가다 보니 경제가 보였다. 렌즈가 하나 늘 때마다 같은 풍경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언어는 그런 렌즈 중 하나다. 아마 가장 넓은 렌즈일 것이다. 역사는 도시를 다르게 보게 하고, 경제학은 시장을 다르게 보게 한다. 하지만 언어는 사고 자체를 다르게 한다. 절대 방향만 쓰는 언어의 화자가 낯선 공간에서도 뛰어난 방향 감각을 보여주듯, 언어는 세상을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

번역기는 도착지까지 데려다준다. 하지만 길 위에서 무엇이 보이는가는 당신이 가진 축의 수에 달려 있다.




AI 시대에 더 중요해지는 이유

AI가 정보를 평준화하고 있다. 누구나 같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논문을 읽고, 코드를 짜고, 시장을 분석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줄었다. 정보의 양에서 차이를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해석의 깊이에서 나온다. 같은 데이터를 보고 무엇을 읽어내는가. 같은 시장을 보고 어떤 결을 감지하는가. 그것은 가진 축의 수에 달려 있다.


전 세계 과학 논문의 90% 이상이 영어로 출판된다. 인터넷 콘텐츠의 50~55%가 영어다. AI가 이것을 번역해줄 수 있다. 하지만 번역된 텍스트를 읽는 것과, 그 텍스트가 쓰인 언어의 맥락을 이해하면서 읽는 것은 다른 경험이다. AI가 논문을 번역해도, 그 논문이 어떤 학문적 전통 위에서 어떤 뉘앙스로 쓰였는지는 번역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연구들이 있다. 이중언어 사용자의 뇌에서는 회백질 밀도와 피질 두께가 증가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치매 증상의 발현이 평균 4~5년 늦어진다는 메타분석도 있다. 성인이 되어서 배워도 늦지 않다. 인과관계가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방향은 일관된다. 새로운 축을 세우는 과정이 기존의 축들까지 함께 단단하게 만드는 것 같다.



창의성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보인다. 고숙련 이중언어 사용자는 창의적 사고 검사에서 단일언어 사용자보다 유의미하게 높은 점수를 기록했고, 이 효과의 45.7%를 인지 유연성이 설명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단련된 유연성이 창의성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외국어 학습이 키우는 또 하나의 능력이 있다. 메타인지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능력. AI에게 좋은 질문을 하려면 먼저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구조화해야 한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본질이 메타인지인 셈이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훈련된 그 능력이 AI를 다루는 능력으로 전이된다.


AI 시대에 차이를 만드는 건 정보가 아니라 차원이다. 차원이 많을수록 같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결을 읽어낸다. 언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확실한 차원 확장 도구다.


꼭 영어일 필요는 없다. 일본어를 배우면 벚꽃이 지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物の哀れ'라는 축이 생긴다. 독일어를 배우면 영어에는 없는 감정의 칸이 생긴다. 어떤 언어든, 그 언어가 열어주는 세계관의 축은 번역기가 대신 세워줄 수 없다.


같은 세상, 더 많은 차원. 그것만으로 하루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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